오늘의 현실과 열반일의 의미

20여 년 전 열반재일에 인도(印度)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한국의 스님들과 불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정진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사라쌍수 나뭇잎이 눈송이처럼 지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부처님 당시 모습을 재현이라도 하듯 보리수나무 잎이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잎 두잎 자꾸 떨어지더니 2~3일 사이에 보리수나무가 새잎으로 싹 갈아입었습니다.
《열반경》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더욱 환희심이 생겨서 떨어진 보리수 잎을 한 잎 두 잎 주워서 인연 있는 불자들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책장 사이사이에 정성껏 꽂아두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가지고 와서 보리수잎을 책상위에 쏟고 책을 책꽂이에 꽂고 돌아서자 그 보리수 나뭇잎들은 모두 낙엽이 되어 도르르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큰 일깨움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복덕(福德)과 지혜(智慧)가 아무리 많아도 금생(今生)에 그것을 다 소진해버리면 나뭇잎에 붙어 있는 명(命)이 다해서 떨어지는 저 보리수처럼 바람결에 뒹구는 낙엽 같은 인생으로 전락하는구나. 보리수 나뭇잎을 법신(法身)에 비유하고 보신(報身)에 비유하고 화신(化身)에 비유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네 인생은 덧없는 것 아니냐 싶으니, 잘 살아야겠다. 더 잘 살아야지….”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국화를 키워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가을에 꽃이 필 무렵에는 물을 자주 줘야 합니다. 국화라는 식물도 관심을 가져보면, 낮에는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잎을 축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물을 한바가지만 퍼서 부어주고 돌아서서 바라보면 벌써 푸릇한 생기를 함빡 머금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자후보살(師子吼菩薩)이 부처님께 여쭙니다.
“무슨 연유로 2월 달에 열반하십니까?”
이에 부처님이 말씀 하시기를,
“2월은 봄이다. 봄에는 만물이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강물이 많아지고, 온갖 동물들이 새끼를 치는 때이므로 중생들이 항상하고 즐겁고 기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중생들의 이러한 항상하다는 생각들을 깨뜨리기 위해서, 모든 법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여래(如來)만이 법신불(法身佛)이여서 변(變)하지 않는다고 말 하고자 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이 말씀은 육안(肉眼)을 지니고 있는 중생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는 자, 안목(眼目)있는 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목 있은 이는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고 할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이에게 따로 부처님 가르침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흙은 물의 성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물은 불의 성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불은 바람성분이 없으면 존재 할 수 없고. 바람은 흙이 성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우수경칩 때가 되면 실감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흙은 물이 함께 어울려 주지 않으면 분진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4가지 요소가 각기 성분이야 다르지만 진공상태에서는 불이 없듯이, 바람은 또 흙이 함께해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치도 알아야 합니다. 날씨가 가물거나 얼었다 녹았다하는 이른 봄은 바람을 부릅니다. 나 좀 흔들어 달라고 합니다. 또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우수경칩에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왜냐면 눈이 녹으면서 땅을 눌러줘서 대지의 나무들이 ‘바람아 나 좀 도와줘. 내 등 좀 긁어줘. 내 뿌리 좀 바로 세워줘.’하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2월에 열반에 드시려고 하신 것은, 히말라야 설산이 녹기 시작하여 춘삼월이면 얼음이 녹아 물이 많아지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통해서 무상(無常)한 세상(世上)을 항상(常)하다고 믿게 되는 중생들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자후보살이 또 묻습니다.
“처음 태어나실 적과 출가(出家)하실 적과 성도(成道)하실 적과 법륜(法輪)을 운전하실 적은 모두 8일에 하셨는데, 어찌해서 열반(涅槃)에 드심은 보름날에 하시나이까?”
구름 한 점 없는 보름날 아무리 달이 밝아도 연꽃은 밤이면 오므라듭니다. 반대로 아무리 날이 흐려도 낮에는 연꽃을 피웁니다. 또 도둑들은 밝음 때문에 함부로 행동 못합니다. 도둑은 어두컴컴할 때 움직여야 하는데 달이 밝게 떠있다면 그가 누군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념(正念)으로 망념(妄念)을 제어하고, 무념(無念)으로 정념까지 여의게 하면 무심(無心)한 일념(一念)의 도(道)는 드러나게 되는데, 마치 사람들이 맑고 깨끗한 거울을 들면 얼굴을 보려하지 않아도 거울에 얼굴이 저절로 비치는 이치와 같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환경과 기후와 풍토 등과 어우러지면 저절로 싹이 납니다. 우리들이 성불(成佛)하려고 하는 것도, 극락(極樂)가려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올바른 생각으로 바로 살면 됩니다. 불자(佛子)의 모습 잃지 않고, 사람의 모습 잃지 않고, 늘 자신의 도리(道理)를 다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생각(生覺)입니다. 올바른 생각은 번뇌망상을 여의게 한, 그 자리에 도(道)는 본래 있었습니다. 생멸이 없고 증감이 없고 미추가 없고 대소가 없고 장단이 없는 그곳에 법은 항상한 것입니다.
싹이 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싹은 저절로 나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면 어두움을 없애려하지 않아도 어둠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심(無心)한 마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심한 마음은 마음 없는 참마음입니다. 세속적인 무학자를 배운 게 없는 사람이라 하고, 불교의 무학자는 배울게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무심이라는 마음을 세속적인 시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은 한결같은 마음, 생멸이 없고 증감이 없고 대소가 없고 장단이 없는 마음, 분별식심(分別識心)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는 말은 생각이 없고 마음이 없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심한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이런 비유를 든 적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큰 느티나무 같은 보리수가 있는데, 나뭇잎이 하나 떨어져있자 그 나뭇잎을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이 나뭇잎이 많으냐? 저 큰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이 많으냐?” 하십니다. 이는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그렇게 비유를 들어 아난존자에게 물으신 것은, 이치에 의지하고 말을 좇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처님의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이치를 말씀 하시고자 하신 것이고 맑고 깨끗한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에 아난이 “저 나뭇잎이 많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그러느냐. 내가 설한 법은 손에 들고 있는 이 나뭇잎 보다 적고 내가 설하지 못한 가르침은 저 보리수 나뭇잎보다 많다.”고 하셨습니다.
팔만대장경에 있는 그 많은 말씀을 통해 섬세하고 상세하고 세심하게 일깨움을 주셨는데도, 이런 것들이 손바닥에 있는 나뭇잎만큼도 안 되고, 전해주지 못하신 가르침은 우주 법계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반에 드시기 전 아난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나는 이제까지 모든 법을 가르쳤다. 법을 가르치는데 인색해 본 적이 없다. 이제 나는 늙고 기운이 쇠했다. 이제 내 나이 여든이다. 낡아빠진 수레바퀴가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내 몸도 겨우 움직이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각지에 흩어져있는 제자들을 모이게 하시고, “세 달 후에 열반(涅槃)에 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또 하루를 움직여서 걸어 가셨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부처님은 태어날 때도 길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셨고 도(道)를 이루신 곳도 길가 부다가야 보리수 밑에서였고 45년 동안 길에 다니시면서 전법을 하시다가 구시나가라 길가에 있는 사라쌍수 나무 밑에서 열반(涅槃)에 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구시나가라 사라쌍수 밑에 자리를 펴고 “나는 오늘 밤 여기에서 열반에 들 것이다.”고 하신 뒤 한쪽 곁에서 울고 있는 아난에게 “아난다야 울지 마라. 가까운 사람과 우리는 언젠가는 한번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인연이다. 한번 태어난 이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너는 그 동안 나를 위해서 수고 많이 했다.”고 위로(慰勞)를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난의 8가지 덕목을 칭찬 하신 뒤 장례절차에 대한 물음에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출가자들은 나의 장례 같은 것에 상관하지 말라. 너희는 오로지 진리를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하라. 나의 장례는 신도들이 알아서 치러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네 명의 아내를 둔 사람을 비유로 들어 설법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부인을 시험해볼 요량으로 “내가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같이 가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네 번째 부인은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 번째 부인은 “전송은 해 주겠다.”합니다. 두 번째 부인은 금방 따라갈 것처럼 자지러지더니 이내 돌아섭니다. 그러나 첫 째 부인은 “좋아도 내 낭군이요, 싫어도 내 낭군인데, 당신 가시는 길에 어떻게 혼자 가게 하겠느냐”며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네 번째 부인은 자신의 몸뚱아리를 비유한 것입니다. 세 번째 부인은 자신의 이력과 인연 맺은 사람들을 비유합니다. 두 번째 부인은 부모 형제 처자 권속을 비유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부인은 자신의 업(業)이자 본성(本性)자리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업 덩어리에 대해 별로 관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음 생(後生)까지 꼭 따라간다는 것을 명심하고 살았으면 합니다. 이것이 바로 네 명의 부인으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이들이 슬퍼서 사라쌍수 나무 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난은 부처님을 번거롭게 해 드려서는 안 된다고 하며 부처님을 문병(問病)하려 하는 이들을 거절 합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라.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말아라. 그들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온 것이 아니라 내 설법을 듣기위해서 온 것이다. 그들은 내 말을 들으면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설한 내용에 대해서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지금이 적절한 때다. 궁금한 것 있으면 묻고 의심나는 것 있으면 물으라.” 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고 눈물만 흘리고 있자 아난이 그 모습을 보고 “의문을 지닌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전하니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훈(遺訓)을 말씀 하시고자 합니다.
“그대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라. 물과 우유처럼 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하지 말라. 교법을 지키고 배우며 수행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받들어 의지하고 방일하지 말며 부지런히 정진하는 불자가 되도록 열반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살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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