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본성을 찾는 백중기도

부무상계자夫無常戒者는 입열반지요문入涅槃之要門이요
월고해지자항越苦海之慈航이라.
시고일체제불是故一切諸佛이 인차계고因此戒故로 이입열반而入涅槃하시고
일체중생一切衆生도 인차계고因此戒故로 이도고해而度苦海이니라.
-《무상계無常戒》 중에서-
 
무릇 무상無常한 이치를 아는 사람이 번뇌망상煩惱妄想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涅槃의 세계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불보살님도 무상한 이치에서 발심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상을 이루셨고 일체중생들도 무상한 이치를 요달해야만 적멸寂滅의 세계에 들어갈수 있다는 가르침 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는 이번 긴 가뭄 끝에 전국적으로 내린 단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1,200억 원 정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계산법은 수자원공사의 물 값으로 환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계산법에는 가뭄으로 타들어가던 대지에 감로의 비를 내림으로 해서 생물들이 성장하고 목마름을 해소하는 부가가치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마치 우리네 어머니들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가사노동에 대한 대가를 조건 없는 가치로 그냥 넘겨가듯이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란분절일盂蘭盆節日 입재기도에 이렇게 많은 불자들이 동참하여 장엄한 법석의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한 효심孝心으로, 인과因果를 믿고 윤회輪廻를 부정하지 않는 불자들의 신심과 정진력으로 비춰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란분盂蘭盆이라는 말은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란분절과도 깊은 관련이 있고, 천상天上,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의 육도윤회六道輪廻 세상 중 두 번째 세상에 살고 있는 아귀는 욕심과 깊은 고리의 끈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그 번뇌를 버리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해야 할 도리道理나 근본根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2,600년 동안 종교 간의 갈등과 분쟁에서 희생을 당할지언정 종교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는 유일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현재 상황을 보아도 그렇고 중동의 여러 나라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특히 주위의 나라들은 불교국가로 남아있는데 가톨릭 국가가 된 필리핀을 보면 더욱더 철저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제국주의帝國主義 시절에 그 나라를 점령한 서양의 그 어떤 나라가 종교적으로 필리핀을 철저하게 짓밟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불교는 차라리 죽임을 당할지언정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았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인간학 입니다.


또 인연因緣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도 부처님은 마지막 열반에 드실 때 “나는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중생의 모습을 비유하자면 우유와 같습니다. 우유를 가만히 놓아두었다고 요구르트가 되지는 않습니다. 요구르트의 과정을 거치면서 치즈가 되기도 하는데, 치즈에도 여러 유형의 치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찌꺼기는 버터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생도 부처성품을 다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유에 요구르트 성분이 있고, 치즈 성분도 있고, 버터성분도 있다고 해서, 그렇다고 우유를 요구르트나 치즈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유는 요구르트도 될 수 있고 치즈도 될 수는 있습니다. 우유가 최고의 치즈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있듯이, 육도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정진이 있어야 합니다.


법륜을 굴리는 데에도 양이 끄는 양거羊車가 있고, 사슴이 끄는 록거鹿車가 있고, 소가 끄는 우거牛車도 있습니다. 그 경계를 성문소승聲聞小乘, 연각중승緣覺中乘, 보살대승菩薩大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결국 일불승一佛乘인 백우거白牛車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공성空性의 공空은 생멸生滅이 없고, 증감增減이 없고, 미추美醜가 없고, 대소大小가 없고, 장단長短이 없습니다. 제법공상諸法空相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불생不生을 들든, 불멸不滅을 들든, 생멸生滅을 들든, 그 무엇인가를 들게 되면 집착執着이 되는 것입니다. 불생을 들면 불생이 아니고 불멸을 들면 불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사生死가 있어서 열반涅槃이 있는 것이지, 생사를 여읜 자리에 열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유가 가만히 두었다고 요구르트가 되지 않듯이, 우유가 가만히 있는데 치즈가 되지 아니함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도 가만히 있어서는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부를 만들 때 간수를 치듯이 우유에도 필요한 효모(파구수 즙액)를 넣어야 하고, 적당한 온도와 물과 바람의 요소도 있어야 요구르트도 되고 치즈(제호)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혜를 ≪능엄경楞嚴經≫에서는, 『견견지시見見之時에 견비시견見非是見』이라 했습니다. “볼 것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
쓸 것을 쓰는 것은 쓰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 내 가족은 근검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주위를 살피고, 어려운 이웃과 나눔을 함께하는 우리들이길 바랍니다.
선업善業을 지어서 천당天堂이나 복된 가정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도를 윤회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업장業障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업이 있는 한, 우리는 윤회하는 세상을 자유로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업장의 장障자는 장애를 의미하지만, 업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주 깊숙이 감춰져 있어서 스스로는 못 느끼다가도 그 업이 드러날 때에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숨겨놓았던 업이라도 드러나야 될 때에는 장애障碍를 불러들이는 유혹의 손짓을 할 것입니다.


인식기관도 생각해 보십시오. 눈으로 볼 때는 뻔히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귀로 들을 때는 거슬리기도 하고, 머리로 헤아릴 때는 계산법이 빨리 안 나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처음마음의 느낌으로 돌아가 가슴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업은 녹지 않아서 그 업 그대로 나고 죽는 과정의 고통과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치우쳐 집착하면 번뇌와 망상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니 내가 나를 관찰해보면, 아직도 그 업으로 우리 주변의 인연들이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세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깊은 인연의 영가들을 위해서 재齋를 모시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목이 없고 지혜의 눈이 없어서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불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며,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연결 지어져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입니다. 인연 있는 영가가 지옥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천도재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영가가 극락에 계시든, 천당에 계시든, 딴 세상 어디에 계시든, 목련존자의 어머니처럼 욕심이 많아서 아귀고餓鬼苦를 범했다면, 백중 영가천도재를 지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의 간절함이 결국 선근으로 꽃피워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천도재를 지내는 지극함은 생사윤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참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원력이요, 간절한 바람입니다.


달마대사는, ‘마음은 모든 성자의 근원이며 만 가지 악행惡行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의 즐거움도 내 자신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윤회輪廻의 고통과 괴로움도 자신의 마음에서 온다.
그러므로 마음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 문이고 해탈로 나아가는 나루터.
일단 마음의 문을 열면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할 것 없고 나루터를 알면 강 건너 기슭(피안의 세계)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 없다.”
이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문이며, 해탈과 열반의 문에 다다르게 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탈 수 있는 나루터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의 문을 열면 나아가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나루터가 어딘지를 알면, 저 강을 건너가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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