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행복하라

불법승 삼보께 귀의하오며
중생을 위하는 깨달음을 간절히 구하옵니다.
일체 종지의 원인과 조건을 관함에 정진하겠나이다.
공성의 지혜 여섯 바라밀을 통해 궁극을 성취하겠나이다.


티베트 수행의 정수가 담긴 수행의 차제는 하근기를 시작으로 중근기 그리고 상근기에 이르는 단계를 면밀히 다룹니다. 티베트 티송데첸 법왕 당시 선정만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반대 사상에 직접적으로 반박하기 위하여 까말라실라와 마하연 논사의 논쟁을 근거로 논술되었습니다. 논서는 보편적으로 대중들에게 읽힐 수 있는 논리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마타의 지품과 보다 심오한 관품에 대한 항목에 대해서는 이 보다 명쾌하게 다루는 다른 수행서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법을 구하는 이에게 바른 법을 설하는 스승의 마음은 오직 하나, 중생의 본질을 스스로 일깨워 보다 가치 있는 본연의 삶을 구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스승은 수행의 길 위에 선 이의 일상과 삶의 구도에 대한 조언자가 되어 귀중한 인간의 몸을 바른 사유를 통해 다룰 수 있는 나침반이 됩니다. 수행자는 석가모니 붓다의 설법과 역대 논사의 가르침에 비추어 수행의 지침을 보다 정갈히 실천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실현되는 삶의 가치에 견줄만한 보석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의 생을 괴롭게 하는 업과 번뇌는 분별에서 생겨납니다. 수행의 단계에 들어선 이는 실집의 희론을 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공성임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본래부터 실제 한다고 하는 바에 대한 분별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공성입니다. 대상의 실제 함이 없는 무자성을 보는 주체의식 조차도 무자성임을 명확히 알아가는 것이 바로 수행의 단계입니다.
붓다의 후대 법문에 해당하는 삼전법륜인 반야부 경이 북방 불교권에서 근저로 삼기에 우리는 보다 철학적 불교논리의 근거를 명확히 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티베트불교의 정수는 금강승 수행과 함께 인명학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불교에서는 인명학에 대한 근거 있는 전통의 뿌리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오늘날 티베트불교에 보다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중관학을 뒷받침하는 사상은 오직 인명학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끊어야 할 바를 끊고 모든 얻어야 할 바를 얻으신 분이 바로 붓다입니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믿는 수행자의 인연은 매사에 신중해야 합니다. 분석을 통해 법을 취하는 이를 상근기의 수행자라고 칭하는 반면 오직 믿음으로서 신앙하는 이를 일컬어 둔근기의 수행자라고 하였습니다. 법을 볼 때에도 말을 볼 것이 아닌 뜻을 보며, 요의를 봐야 하고, 의식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선지식의 수승함을 찬탄함에 있어서도 스승의 법이 진실로 붓다의 법과 모순이 없는가를 면밀히 분석해야 합니다.
가치적인 요의에 의지하여 법을 통해 나의 지혜가 성장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래의 뜻이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가. 속제인가 진제인가를 의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의 법칙들은 언어로 존재하지만 진실한 공성에서는 실제 하는 바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를 아는 바가 바로 요의를 보는 것입니다. 세속에서 통용되는 바를 넘어 일체가 무자성이라는 바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바로 알고 사유하는 수행자가 바로 상근기입니다.
저명한 인도의 핵 분야 물리학자 라자라마나는, “양자물리학 분야의 기초 이론이 약 2천여 년 전에 티베트불교의 논사 용수보살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가설을 논하였습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양자물리학이 학계에서 불교의 공성과 꾸준한 대화를 나눈 것도 3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각자의 연구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흥미로운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오로지 간절한 신앙심만으로 불교를 믿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타 중생을 위하는 자비의 실천 역시도 21세기에 걸맞은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함을 불자 스스로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디 색 수 상 행 식으로 이름 붙여진 보특가라의 공함을 보는 불자가 되십시오. 우리가 법을 법답게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시야가 좁으면 어리석어집니다. 불자들에게 성지순례를 권장하는 이유는 보다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화두로 삼은 바에 대한 실상의 예를 풍요롭게 사유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중생 속에서 자비심을 내는 것이란, 내가 안락함을 원하듯이 타인도 나와 다름이 없는 안락을 구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바탕이 되면 내 주변의 가족과 벗의 애착 관계를 넘어 나와 다름이 없는 평안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의 인류를 마치 나 자신을 돌보듯 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미워할 적과 원수가 단 한 명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보살은 왜 차별이 없는 연민을 할까요. 번뇌에 시달려 본래의 품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발심을 하여 나의 모든 바가 중생을 향하고 오직 그들을 위해 베풀어질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보살이 서원한 선이 중생에게 올곧은 열매를 맺어 그들을 위하는 바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진실한 하나의 정법을 온전히 지니고 동시에 완벽히 실천합니다. 하나의 법이란 무엇인가. 바로 대자대비심이 그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습으로 인한 집착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직면하는 문제의 근원은 이 집착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하루 날을 기점으로 잡아 근거 없는 집착의 본성을 직시하여 마치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를 대하듯이 오직 평등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대하는 수행을 해 보기를 권유합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고 상대의 반응을 분석해 보십시오.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어 분별로 인한 호 불호의 경계에서 유연해 지는 훈련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애심 수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애심이란 삼계의 일체 중생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또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행복합니까? 지금의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비해 만족하고 있습니까?
나의 행복과 만족의 척도는 무엇인가요. 오늘날 인간의 욕심과 추구하고자 하는 쾌락의 척도는 만족의 한계 수위가 없어 보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고 속임을 통한 사기행이 만연하면서 빈부의 격차 역시 감당키 어려울 만큼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탐 진 치에 휩싸인 이들이 마치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탐욕의 번뇌로 사로잡힌 이들의 마음이 자애심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해야 그들이 지닌 허물을 스스로 알아차려 본래 면목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어린 아이가 힘들어할 때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내가 연민하는 중생들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수행해야 하리.
중생에는 차별이 없음을 아는 그것이 바로 대자비심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