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설법에 물음표를 들라

바른 인식이란 대상을 앎에 오류 없음이라.
인식 마음 의식이란 서로 다르지 아니하니
일체가 반연한 생각 관념이 만들어낸 바
공화空華, 이른바 마음의 표상이라.


인식론에 관련한 다양한 티베트의 논서가 있다.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2) 역시 그의 나이 열 살 때에 스승 링 린포체의 지도로 불교인식론의 암송을 시작하였다. 전반적인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은 마음 다스림에 관한 지침으로 해석된다. 그 가운데 인식론은 인간 본연의 의식의 힘을 체계적으로 성장시켜 문제를 일으키는 상반된 인식의 감정을 제어하고 분석하여 해결해 가는 바에 대한 논의이다. 결국 마음 다스림의 지침서가 담긴 정수가 인식론이며 오늘날 티베트불교의 꽃으로 수식되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티베트 학생들을 위한 법회가 열린 겔룩빠 산하 남걀사원 법당에서, “다스리지 못한 것을 다독이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아 마음의 법성을 밝히는 것이 바로 재가 불자의 수행도”라고 말했다. 의식의 심왕心王을 근본으로 삼아 본래 여여한 자연의 도리를 네 가지 고귀한 진리와 바른 사유의 행도로 헤아림으로써 세상의 이치와 그 흐름을 아우르는 것, 그것이 참된 불교도의 수행하는 삶이라고 일깨웠다.


“일어나는 현상의 작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살피고 활로를 찾아라.”
“의식의 작용에 있어 생멸하는 미세함의 정체를 관하라.”


오늘날 티베트불교는 인식론의 논서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철저히 논증하고 있다. 이 분야는 600만 티베트인의 숭고한 불심으로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현대 정신의학계 분야와 적극적으로 통섭 중인 분야이기도 해 서양의 하버드를 비롯한 명문대학은 물론 관련 연구소에서 티베트불교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존재하는 것의 실상은 어떠하며 의지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묻는다.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말이 아닌 뜻에 의지하고 요의에 의지하되 본연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붓다의 설법 또한 그러하다. 들은 바, 그대로만 수긍하지 않아야 하니 요의와 불요의의 차이를 분별하고 논하는 까닭이 그러하다. 반드시 제 6식에 의지하라. 그로 말미암아 공성의 도리로써 본래 실상을 해석할 수 있으니, 비로소 실상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란, 공성의 지혜로 분석된 바이다.


여러분. 내가 생각하는 주체의 대상이 착각이라면 어떠할까요. 인식으로 가늠할 수 있는 대상에 한계라는 것이 있을까요. 오류의 인식으로 대상을 가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 예로 『현관장엄론』 8장에서 미각이 지닌 착각에 대해 논한 바 역시 무척 흥미롭습니다. 『현관장엄론』은 생각이 지닌 관념의 착란을 섬세하게 파악한 저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식으로 파악되는 대상에는 법성, 행위, 상호 의존에 의거하는 이치가 기반 되어야 함도 이 논서를 수학할 때 반드시 숙지해야할 부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인이 몹시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한다고 여기는 실집과 법집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불법의 진리를 만나 사유하여 그 이치를 파악함으로써 일체 현상이 무자성임을 이론적으로 사유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서는 활용하지 못하고 결국 본연의 자성이 있다 여깁니다.
저는 법회를 통해 전 세계의 불자들에게 당부하는 바가 있습니다. 붓다의 음성을, 선지식의 기록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그것입니다. 분석과 사유를 통해서만 믿음의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입보리행론』 8장에서 이기심의 허물과 이타심의 장점을 논하고 있는 바를 봅시다. 이기심이 크면 클수록 더 큰 화를 야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 이기심이 일어날수록 나의 마음이 더욱 불안해지는 것은 왜일까요?
여러분은 일상에서 얼마나 논리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고 여기십니까. 티베트불교 수학 체제에서는 항시 논리학과 인식론의 분야를 강조해 왔습니다. 법칭논사와 진나논사의 인식론에서 다룬 귀경계를 보면 바른 사람을 일컬음에 중생을 널리 구제할 수 있는 바른 사상가를 찬탄하였습니다. 인도의 다양한 학파의 외도에 의해 반박을 당하는 것에 논증하는 것으로 티베트불교의 인식론은 보다 견고히 완성되었습니다. 만약 대 선지식 샨트락시타께서 티베트에 오지 않으셨다면 티베트인들은 설산 왕국에 고립되어 21세기를 맞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과거 반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까지 티베트인의 정체성은 미개했습니다. 티베트불교를 라마교라고 속칭하거나 탄트릭 불교라고 저급화하면서 심지어는 참된 불교가 아니라는 크고 작은 오해를 샀습니다. 1950년대 이후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티베트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해외를 방문한 티베트 학승들에 의해 그러한 오류를 바로 잡게 되었습니다. 14대 달라이라마인 저를 비롯한 20세기의 인물들의 시대는 이런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현대 양자물리학 분야에서는 불교의 유식 중관학, 그 가운데서도 중관학의 상호 연기설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파란색을 인지하는 안식이 있어 그로써 색이 성립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불교에서는 본래 실제함이 없는 파란색의 실상을 분석하는 논리구조를 인식론에 준하여 다층적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심리학의 분야에서도 감정의 제어와 뇌신경의 분석을 불교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뇌에 기반한 감정과 마음, 그리고 의식의 주체를 논하면서 명상과 뇌파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려는 시도가 그것입니다.
지관수행은 불교 고유의 수행법이 아닙니다. 존재에 대한 인식을 수행도로 활용하는 다양한 외도가 있음을 알고 그들의 수행법 역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불교가 종교를 넘어 전 인류를 위한 인식의 논리로 재해석되고 재평가 되어야 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행보에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해 야할 것입니다. 인도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붓다의 수승한 법이 오늘의 21세기에 부합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청년 불자들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