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담긴 공성을 보라

발심이란 무엇인가.
일체 중생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대자비심을 내신 분
천인 중의 천인이신 붓다의 법륜 반야경 연기법의 진리로 밝히신 선지식
이제와 사성제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이치 바르게 깨닫도록 가피 하소서.
바른 지식에서 난 신심으로 바른 수행의 길에 들도록 하소서.
불변의 신심으로 청하옵니다.
종교를 실천하도록 조력하는 것이 사상이다. 종교의 사상적 뒷받침은 믿음과 헌신이다. 붓다의 말씀을 실천함에 가장 먼저는 복덕이 아닌 것과 나라는 생각을 끊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하였다. 번뇌로부터 벗어난 육도의 상위 세계로 일컫는 삼선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열 가지 불선의 계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에 용수보살은 여섯 가지를 더하여 총 열 여섯 가지의 불 선행을 논하였다. 전체 100개의 게송 안에 현교와 밀교의 가르침을 두루 다루고 있어 논의의 범주가 광대한 「보리심석」이 바로 용수보살의 논서이다.
현대인에게 음주는 문화가 되었지만 용수보살은 계율 상에서 불선업으로 명하고 있다. 심지어 한 방울이라도 혀끝에 대지 말라 당부하였다. 술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바른 판단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까닭임을 밝혔다. 심지어 지혜의 독을 일컬어 술이라 이름 하였다.
바른 생업에 있어서도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베풂에 예의를 갖추되 작은 동물에게도 마음을 내어 돕도록 해야 한다. 한 번은 영국의 뉴스 채널 BBC에서 아프리카의 외지 마을에서 벌어진 귀신에 빙의되었다고 간주되며 지역 공동체 사회로부터 버림당하다시피 방치된 아이를 어느 외국인이 마음을 내어 자식처럼 돌본 경우가 보도된 바 있다. 달라이라마의 재단(DALAI LAMA TRUST) 역시 티베트 난민과 승가의 복지를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말한다.
“도움의 행실이란 공손한 공양이어야 합니다.”


보시를 하고 도움을 준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한결 같은 자애심을 낸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도리입니다. 복덕이 아님을 끊으라는 말이란 그런 의미입니다. 나와 나의 것이라 여겨온 법집과 실집 그 마저도 끊어야 합니다. 그로서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불교이지만 유식학파의 설을 용수보살의 논리로 파악하면 오류가 많습니다. 중관학의 공성의 이치와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논리와 이치상에서 어긋남이 있다면 반드시 바른 사유로서 올바른 정의를 구해야 합니다. 중관학에서 강조하는 공성과 보리심으로 수행의 뼈대를 삼으라는 것은 사리 분별의 애매함을 명확히 갈무리하기 위함입니다.
진제의 보리심을 봅시다. 공성을 깨우치는데 있어서 「보리심석」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입니다. 거친 의식을 차단한 가운데 가장 미세한 의식을 발현하여 공성의 도리를 깨닫는 이치입니다. 몸과 말 그리고 마음을 여의는 도리로 광명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의식의 발현을 요구합니다. 오로지 정광명만이 남아 공성을 지각할 때 이를 견도위라고 하였으며 이로서 공성을 명확히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보리심석」은 금강승의 논서입니다. 때문에 금강살타께 귀의하는 것으로 논을 시작합니다. 금강살타는 사신을 구족한 법신이자 색신의 환신입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을 정화하고 환신하여 붓다의 색신을 이룬 바입니다. 이를 일컬어 몸과 말 그리고 마음이 한 맛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란 무시이래 생한 바 없기에 그대로 공합니다. 불교에서는 인무아를 인정하지 않기에 오온과 분리된 자아가 있다고 논하는 견해를 두고 외도로 분류해왔습니다. 달라이라마라고 하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 지난 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그리고 나와 나의 것을 분별하려 한다면 과연 진정한 나는 어느 시절이었다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나와 나의 것을 말하는 것은 육신도 아니요 심지어 영혼도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영원히 불변하는 의존함이 없는 독립된 그 무엇이라고 사유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엄청난 오류에 휩싸이고 맙니다. 이름 지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체 그대로 본래 있었다고 사유의 기반을 삼게 되는 것입니다. 인식하는 주체를 반영함에 대해 논함에 있어 중관학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바조차 집착이라 논하였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대보리심을 일으키겠노라’라고 서원해봅시다. 진제의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성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번뇌장을 아울러 소지장까지 일체의 무지를 여의기 위해 공성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중론」의 전체 27장은 각각의 장에서 공성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성 역시 보리심이 없이는 일체종지라고 명하는 붓다의 경지까지 이르지 못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보리심은 항시 중생을 향해야 합니다. 자타 상호 교환 수행법을 통해 과거 모든 중생이 나의 어머니였다고 여기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로서 선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내가 이와 같이 타인을 이롭게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일체 중생이 궁극의 깨달음으로 함께 정진함에 붓다의 가피란 특별한 고차원의 그 무엇이 아님을 염두 해야 합니다. 붓다의 설법을 통해 제자 스스로가 본인의 근기를 성숙시켜가는 성과가 바로 붓다의 가피입니다.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진제와 속제가 한 맛이 되어야 합니다. 끊어야 할 바를 모두 끊어 일체의 공덕을 쌓았음을 일컬어 깨달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멸제는 과연 공성일까요? 수행의 이해와 깊이는 이러한 물음에서 시작됩니다. 공성이란 광명의 본질입니다. 보리심의 수행만이 윤회를 해체합니다. 의식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외경을 반영함의 원칙에 담긴 공성의 골자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름조차도 실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중관학파는 이로서 마침내 그 어떠한 형상과 색도 남은 것이 없음을 사유하라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외경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제라는 이름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과연 이름으로서 무언가는 남아 있어야 할까요. 실제 하지 않지만 이름으로서 남아 있다면 과연 공성에 대입하여 인식될 수 있을까요. 중관학의 논리에 기반하였을 때 현재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무엇은 단지 그 존재성에 의존하는 것일 뿐입니다. 영원성을 가진 존재하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인연이라 부릅니다.
오온을 기반으로 하여 나를 보지만 이 역시 실체가 아님 역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영원한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 합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자량을 키워야 합니다. 참된 생멸이란 무엇인가. 객체와 주체의 실체로서 의식의 제각각의 모습이 단지 색의 형상으로 현현할 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의식이기에 법이 무아임을 압니다. 마치 형색의 부분을 구분하듯이 의식 역시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때에 그 어디에도 현재의 의식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중생은 마음이 있지 않으나 있는 것처럼 보기에 윤회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