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삶은 지혜로운 이의 인생이다

32년 전, 구룡산 자락에 천막법당으로 2년, 가건물 법당에서 1,400여년 만에 통도사에 모신
부처님 금란가사를 모셔 와서 100일간 친견법회를 하였습니다.
1만 부처님을 봉안하고자 하는 불사의 인연을 짓기 위함이었습니다.
불사佛事란 부처님 일입니다. 구룡사는 불자들과 함께 만 불전 불사를 발원하고, 2년 만에 1만 부처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 불사를 위해서 수많은 법회와 헤아릴 수 없는 기도정진을 하였습니다. 구룡사뿐만 아니라 다른 포교당 불사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도정진을 하였습니다.
구룡사 불자들을 신도信徒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불자佛子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부처님제자로서 신심과 원력으로 발심하여 정진하길 바랍니다.


신도는 믿을 신信자, 무리 도徒자입니다. 믿는 무리는 결속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무리 지어져 있습니다. 불교는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 부처님 제자가 된 이들입니다. 불자들은 근본을 망각하지 않고 자기 도리를 다 하기 위해서 그 절의 신도信徒가 아니라 ○○사찰의 불자佛子이어야
할 것입니다.
가족 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근본을 망각하고 자기 도리를 다 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무너집니다. 마치 소유물처럼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자식은 부모를, 부모는 자식을…. 친족이라는 혈족들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으면 애증愛憎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어지는 어려움을 겪게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도 소유하지 못하는데 내가 누구를 소유하며, 누가 나를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는 사찰에서 불자들을
신도라는 이름으로 조직 하고 묶어 놓으면 적절하지 못한 불협화음으로 부담스러운 일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불자는 스스로 부처님 제자이기를 염원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으로는 거사님, 보살님입니다. 대중적으로는 불자님이라 부릅니다.
이와 같이 구룡사와 여래사 등, 우리포교당에는 신도회 조직이 없습니다.
세속적 조직은 수직입니다. 회장, 부회장, 사장, 부사장 등 수직적입니다.
종교의 조직은 수평이어야 합니다. 종교는 평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수직은 감춰져 있어야 합니다. 수직적인 것이 아주 없을 수는 없지만, 종교의 조직을 신도회로 구성하다 보면 수직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포교당에서는 항상 축원할 때 먼저 시작되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영축총림 통도사 적멸보궁 서울포교당 구룡사입니다. ……’
모든 포교당도 그 뿌리(통도사)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0년 넘게 서울에서 살아오고 있지만 통도사를 떠난 적 없습니다. 그 마음을 통도사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통도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통도사는 열매의 씨앗을 구룡사에 심어 꽃피운 결실이 다른 포교당들입니다.
통도사 말사인 우리 포교당들은 통도사의 분신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조馬祖스님이 참선을 하고 있으니까 큰 스님이 묻습니다.
“뭐하시는가?” “예, 깨달음을 구하려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큰 스님은 밖으로 나가서 기왓장 하나를 들고 와서 마조스님 수행하는 선실 옆에서 기왓장을 갈고 있습니다. 마조스님이 묻습니다.
“스님, 뭐하세요?” “아, 나 지금 거울 만들려고 기왓장을 갈고 있다네. …”
그 말씀을 들으면서 거기서 뉘우침이 생깁니다. 기왓장 역할은 이 몸입니다. 그러니까 기왓장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왓장을 지혜롭게 가루를 만드는 것은 거울 동판을 닦기 위함입니다. 이 몸이 앉아서 선정삼매에 드는 것은 청청한 본성을 찾기 위함이며, 맑히기 위함이고,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야명조소夜明鳥巢라는 새를 통해서도 우리는 깨우침을 얻어야 합니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았지만, 야명조소는 저녁에 춥고, 무서워 벌벌 떨며 다짐 합니다.
‘이 밤이 새고 나면 집을 지어서 내일은 편히 쉬리라’ 하였지만, 다음날 아침 햇살에 몸이 녹으면 조건 없는 삶은 지혜로운 이의 인생이다
그 무섭고 추웠던 일들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는 어제 밤일을 잊어버리고 실컷 놀다가 또 저녁이 되면 쉴 곳이 없어 벌벌 떨면서 ‘이 밤이 새고 나면 반드시 집을 짓겠다고.’ 또 다짐 하였습니다. 평생을 그랬는데도 결국 그 새는 집을 짓지 못하고 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새가 야명조소입니다. 어찌 그 새 뿐이겠습니까?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은 내가 나서서 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넘겨주고 길을 떠나자.
나에겐 또 새로운 일이 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힘차게 일어나고 저녁에 누울 때는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지 하며 누울 수 있는 여한 없는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저자거리에 인과는 믿지 않으면서도 죽음은 두려워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한 어려운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힘들어짐 속에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것이라는
관념이 그 무엇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금생에 잘 살아서 본전만 해도 우리는 인간 세상에 다시 올 수 있습니다.
천당이나 극락에 갈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극락세계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저는 참 복된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어른 스님들의 그늘 밑에서 자상한 가르침과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가신 큰스님들의 울타리가 되어 드리고 지켜 드려야 합니다.
또 하나는 성장하는 후학들에게 어른의 모습으로 그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극락세계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업을 많이 지은 업력중생이 복덕과 지혜를 증장해서 극락에 가게 되면 원력보살이 됩니다. 업력중생이 극락에 가는 순간 원력보살이 됩니다. 일생보처에 오르게 되어서 지장보살이 지옥을 향해서 가셨듯이, 관세음보살이 사바세계에 오셨듯이, 극락세계는 대자대비 대희대사 사무량심으로 중생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원력보살의 환승지입니다.


요즘 좋아하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중국의 위지안(于娟)이라는 31살에 세상을 떠난 이의 글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도 했던 여성인데, 아이는 아직도 어린 여섯, 일곱 살쯤 입니다.
그런데 암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면서도 써온 글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과도 같다.
어떤 씨앗은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사랑은 준다는 생각, 줬다는 생각, 받을 것이라는 생각 없이 주는 것입니다.


무조건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이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우리는 조건 없는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조건 없는 삶을 살고 어리석은 이는 무조건적인 삶을 요구합니다. 마음을 존중하는 것은 지혜로운 이의 행동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곡식으로 밥을 짓고 어리석은 자는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