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마음이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

올 여름 무더위는 지난 94년 이후 가장 심한 폭염이라고 합니다. 그 폭염은 이미 지난 7월 6일 시작된 백중기도 초재부터 회향일인 8월 25일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무더위에 각별히 조심하시고 건강도 챙기시면서 49일간 지장기도를 하셨으면 합니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음은 바람과 같다.
마음은 그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마음은 머무는 일 없이 일어났다가
이내 곧 사라져 버린다.”


바람과 같은 마음,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마음을 잘 다듬어가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과 같은 마음, 그래서 머무름 없이 일어났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그 마음을 잘 붙들고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을 붙드는 것은 변별력辨別力으로 판단하는 지혜智慧로운 삶이며 행동입니다.


설악산 무산오현스님의 시 중에 「죄와 벌」이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우리 절 밭두렁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분상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인간적인 이 시대 선지식의 삶입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주관적인 자기 암시와 자기 최면에 빠져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세계를 기계로 진단할 수야 없겠지만, 거짓말 탐지기가 적용 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증상만자增上慢者라 합니다. 또 현대의학에서는 ‘소시오 패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스스로 사실이 아니라고 암시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거짓말 탐지기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이가 스스로 깨달았다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인식하는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드러내는 이들이 생각보다 우리들 주변에 많이 노출되고 있는 것, 우리들은 알면서도 기피증으로 불감증과 무기력하여 말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설악산 무산스님 49재에 참석하여 신흥사 주지실에서 정휴스님을 만났습니다.
오현스님과 정휴스님은 10여 년의 나이 차이는 있지만, 문단에 데뷔해서 좋은 글을 많이 남기셨던 소중한 인연으로 친한 벗처럼 지내신 도반이십니다.
그런 정휴스님을 스님의 49재에서 오랜만에 만난 터라 불쑥 물었습니다.
‘스님을 빗대서 쓴 시가 시집에 있었습니다. 스님 조실스님 시 보셨습니까?’
그러자 정휴스님께서는 그저 빙긋이 웃으시었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내 나이 60에
70 먹은 이 만나면
세상 떠날 날 멀지 않았다고
어른 대접 해줬는데
내 나이 80즈음에
70 먹은 이 만나니
어리다 버르장머리 없이 어리다.”


우리는 오현스님 같으신 선지식善知識을 동시대에 함께 살아 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복된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님은 만년에 곡차(독주)를 많이 드셨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선지식이 몸도 안 좋은 만년에 왜 술을 드셨을까? 의심도 했었을 것인데, 그 숙제를 풀었습니다. 스님께서 전해 주셨습니다.


스님은 최근 몇 년 동안 전혀 음식을 넘길 수 없는 병病을 앓고 계셨답니다. 식도암 수술은 받았지만 음식을 넘길 수가 없어서 빨대로 미음을 조심씩 먹는 정도였는데, 이것마저도 힘들었고 진통으로 고통이 너무 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휴스님에게 조실 스님이 버럭 화를 내시더랍니다.


“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 너는 아느냐. 목으로 음식을 넘길 수 없는 이 처지를 너는 아느냐. 그 독한 위스키라도 목으로 넘겨서 고통과 괴로움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내 처지를 너는 아느냐.”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정휴스님은 오현스님께 ‘몸이 상傷하니 곡차를 드시지 마세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진통제가 듣지 않는 고통을 독주로 극복하시며 산중의 어른 모습을 잃지 않으시려는 조실 스님을 보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며칠 전, 뉴욕 원각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중들이 ‘스님, 다녀오세요.’ 하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돌아 왔습니다.


미국에 살지도 않는 나에게 대중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인사가 아닐까 싶어, 돌아오는 인사였지만 정감 있게 받고 왔습니다. 이러한 삶이 서로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고 정감이 깃든 인연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수행이 없는 종교,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종교는 녹음기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녹음기와 같은 생명력 없이 그냥 소리로 들릴, 인생살이는 절대로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최소한 남을 해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최대한 다른 이에게 이로운 일,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절에만 열심히 다닌다고 극락세계 가는 것은 아닙니다. 견고한 신심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게 살면 육도六道 중에 천당 가고 올바로 살아가야 극락極樂 간다.”


정토신앙淨土信仰의 극락세계도 경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업력중생業力衆生이 일생보처一生補處에 오른 보살이 되면 원력願力, 그 원력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원력이 생길 것입니다. 목적지를 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해서 안주하고 타성에 젖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극락세계도 다녀오는 곳으로 표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살 수 있는 복력福力과 지혜智慧와 용기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종교적인 믿음 없이도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신심으로 믿음이 견고해지면 그 길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마치 저녁시간에 같이 잠자면 편리하고, 남들이 밥 먹을 때 밥을 함께 먹으면 수월합니다. 그러나 밥상 앞에 앉았다고 그저 배부른 것이 아니고 남 잠잘 때 누워 있다고 잠이 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으면 합니다.


불안전한 시대에 살았던 위대한 이들은 자기 자신을 숨기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습니다. 범부중생凡夫衆生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그 틈새에서 눈길을 피해가듯, 비바람을 피해가듯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 자신에게 늘 묻고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지난날의 그림자만을 쫓아가며 그 추억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스스로에게 묻고 있으면서도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을 보면, 나이를 먹고 있는 모양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적게 남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에게 누가 건강하게 오래 살라 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에게도 늙어 보인다는 말, 건강이 안 좋아 보인다는 말은 되도록 하지 마세요. 젊어 보인다고 하세요. 건강해 보인다고 하세요. 작은 립 서비스이지만 진심으로 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도 힘이 될 것입니다.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남에게 도움이 되는 말, 이로움을 주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삶이 조금은 고단하더라도 이보다 못했던 그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