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의 다른 이름, 왜곡된 분멸

“마음과 몸이 바르게 단속되지 않을 때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지혜가 있어도 기억을 잘 못해 행하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리심을 사유하지만 타인과 내가 나누며 조화롭기가 쉽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타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때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면 좋을까요?”
“기독교 또는 이슬람을 믿는 벗과 세상의 이치에 대한 공감대를 어떻게 형성하면 좋을까요?”


북인도의 불교왕국 라다크로 법회를 떠나기 전. 겔룩빠 산하 남걀사원 광장에 마련된 대중과의 만남에서의 질문에 달라이라마는 이와 같이 답했다.


인도에 망명해 더 큰 세상을 접하고 불교의 설법을 통해 귀중한 보리심을 항시 강조해 왔지만 나 자신 스스로가 진심으로 행하기란 쉽지 않음을 안 때가 스무 살 청년기였습니다. 그리고 망명지에서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세상의 갖가지 분란과 부조리가 왜곡된 분멸의 아집으로 인해 여러 문제로 발생됨을 다각도와 다방면으로 접하고 사유하게 되었지요. 그 이후로 세상의 혼란을 이해하고 직시하는 자세에 있어 저는 항시 이타심을 습관으로써 길들여야 할 것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3대 아승지겁 동안 복덕의 자량을 닦으셨다고 합니다. 내 안의 붓다의 씨앗을 잘 보살피고 성장시켜 발현하는데 소요된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생에서 허물의 장단점을 바르게 의심하고 자각하여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모두는 모두 일상생활에서의 소소한 습관과 연관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타인으로부터의 비난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그 안에서 세상의 진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비난의 실체란 무엇인가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인의 험담과 비난으로부터 자비심을 낼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중생심으로부터 연민을 내어 보리심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체 중생을 나의 귀빈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타상호교환의 수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당부하건데 비방에 고착되지 마세요. 궁극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아무리 『금강경』을 만 독하고 『화엄경』을 백만 독하고 「입보리행론」을 달달 외운다 하더라도 그 안의 경 한 줄의 의미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득이 될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실제 눈에 보이는 분야의 범위는 과학자들에 의해 명백한 논리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과거 2천년 동안 창조주에 근거하여 사유되고 신앙되어 왔던 여러 이론이 재정립 되어야만 하는 일종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오늘날 생명공학의 분야에서는 줄기 세포 연구를 통해 난치병의 회복 가능성을 연구하고 생명연장의 실현 가능성을 실험합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빅뱅의 명확한 구조를 밝히고자 하면서 성주괴공은 물론 생로병사의 본질을 찾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더불어 현대 과학자들은 불교에서의 명상과 사유의 부분에 큰 흥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 예로,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남과 동시에 온전한 생명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제 3의 원인과 조건이 필요함에 주목합니다. 어머니의 혈과 아버지의 정이 그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은 제 6식으로써 상속되는 식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전생을 명료하게 기억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의식의 상속과 연관된 부분의 실례입니다.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 함께이건 항시 미소를 지으세요. 이는 무엇을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닌 선의 또 다른 표현으로써의 미소입니다. 나의 선행은 항시 지혜로써 살피고 그 정당성을 겸허하게 단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예로 ‘신’은 충만한 사랑의 절정으로 비유합니다.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신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어떤 이유로 악한 무리를 만들었는가. 자식과 같이 아끼는 인간일 것인데 왜 지옥을 만들어 심판을 하는가. 선의 저울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 것인가. 이 모순의 논리들을 과연 누가 정당히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그 당시 저는 침묵하였습니다.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의 힘을 키우세요. 그로 말미암아 나에게 생기는 장단점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연민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상과 교리에 있어서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아 이웃의 종교와 차별이 되지만, 근본 목적에 대해서 생명 지닌 모두가 행복을 구현하고자 하는데 있어서는 뜻을 함께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더욱이 종교에 의한 분쟁은 더 이상 발생되지 않아야 합니다. 11세기 아띠샤 존자의 제자이신 돔된빠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어느 날 나에게 불행이 닥치면 이와 같이 생각을 하라. 내가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 당신의 번뇌는 무엇입니까. 외부의 해악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현자가 번뇌와 싸울 때 많은 고난이 발생됨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기심과 실집을 끊는 소중한 수행도라고 여기십시오. 분노의 적을 무찔러 진정한 영웅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