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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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불행은 한 뿌리에서 시작된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행복에 대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둠과 밝음, 어리석음과 지혜는 상반된 단어입니다. 그 뜻을 비교해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만큼,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다. 하늘이라는 허공은 끝이 없습니다.
하늘과 땅은 맞닿아져 있지만, 그 거리는 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거리를 천양지차라 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한 뿌리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어둠과 밝음처럼, 불행을 느끼지 않으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한다는 이분논법의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미워하는 것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꼭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밝음과 어둠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결고리,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 행복과 불행으로 나누어지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번뇌煩惱는 탐욕貪慾과 어리석음으로 분출되는 분노심憤怒心이 되고 늘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있는 행복함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본래 현상계의 무상無常함을 보고 한 뿌리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진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인생무상人生無常입니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인생행로에 진행되는 생로병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니르바나(nirvana)입니다. 니르바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기도 합니다. 상락아정은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하는데, 항상 된 나(我)는 법신法身, 즐거운 나(我)는 열반涅槃, 참나(眞我)는 부처, 깨끗한 나(我)는 법法이라 합니다. 현상계에서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무상無常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탐貪·진瞋·치癡 삼독심三毒心인 번뇌煩惱와 재, 색, 식, 명, 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欲樂의 망상妄想으로 생긴 사대四大는 무상無常하고 일체가 고통과 괴로움인 번뇌이며 자아自我는 무아無我이고 부정不淨한 것이 현상계現相界입니다.
그런 자아自我를 깨달아야 하는데, 그 자아는 내가 아닌 무아無我일 뿐입니다.
스스로 나라고 하는 아트만(.tman)은 내가 아닙니다. 왜냐면 무상한 내가, 내가 아닌 것은 상일성常一性이 없기 때문이며 주재성主宰性이 결여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항상 일관된 성품과 나를 주재할 수 있는 내가 없어서 나를 살피지 못하게 되는 현상이 일체개고一切皆苦이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면 천당天堂에 가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극락 간다.”고 하였습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다는 인과因果입니다. 나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다양한 업력業力으로 내몰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선행을 권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가르침,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아무리 들어도 싫증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바르게 관찰하고 바른 생각으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지식知識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智慧에 의지해야 합니다. 지혜란 곧 여래如來라 하셨습니다. 곧 법신法身인줄 알고 거기에 의지해야 합니다.
넷째, 바른 가르침을 따라 능히 실천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지 불요의경不了義經은 의지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행복과 불행은 어디로부터 발현되는 것일까요?
의심疑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의심에 대해 제자들에게 “대게는 의심하지 아니함을 의심이라 한다.” 하셨습니다. “나 너 의심 안 해.”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면 의심하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여래如來는 ‘진어자眞語者, 실어자實語者, 여어자如語者, 불광어자不.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따로 참말이니 정말이니 하는 수식어는 필요 없습니다. ‘정말’이라는 말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음식 만드는데 식재료가 많아야지 양념이 많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파김치를 담글 때 거기에 마늘을 함께 찧어 넣으면 파김치는 파죽이 되고 맙니다. 파도 마늘도 소중한 식재료이지만, 하나는 식재료가 되고 하나는 양념이 됐을 때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화로움은 긍정적인 삶의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게 하고, 의심은 부정적인 삼독심三毒心의 번뇌煩惱라는 것을 알고 살아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에 항상 공존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이 따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한 뿌리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를 행운이라고 합니다.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을 얻는다고 좋아합니다. 야외 들판에 가서 클로버를 보게 되면, 세 잎 클로버는 안중에도 없고 네 잎 클로버만을 찾는 일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사실 클로버 잎은 세 개인 것이 표준입니다. 그리고 클로버 잎은 세 잎입니다. 찾기 힘든 행운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널려 있는 세 잎 클로버의 행복을 찾았으면 합니다. 모두 업력業力에서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불교에서는 인간의 업이 각기 다르다고 말합니다. 업은 선업善業도 있고 악업惡業도 있으며 정업正業도 있고 무기업無記業도 있으며 공업共業도 있습니다.
이 업業을 사유해보면 의지적意志的 작용作用으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모든 업은 의지적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모든 일들은 다 업 때문이라 말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업 때문이라면, 어떤 사람이 나쁜 업을 지었으면 그 사람은 언제나 나쁜 일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행복과 불행은 항상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인, 이웃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맺어온 그 인연을 이승이든 저승이든 어느 세상에 살아가도 기도하고 정진할 수 있는 염원念願이 필요한 것입니다.
매년 우란분재盂蘭盆齋일에는 인연 있는 이들을 위해 49일간 지장기도地藏祈禱를 올리고 있지만, 나와 깊은 인연을 맺은 영가가 아직도 구천에 떠도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백중과 같은 우란분재일이나 불교 명절 때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란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를 발자국이나 그림자처럼 함께 해도 나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요, 천리만리 밖에 있거나 천년만년 후에 있어도 나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이가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이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요,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는 노랫말처럼, 있는 그대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불교는 흔히 인간학을 주창하는 종교라고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 중에 불교만이 유일하게 종교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는 종교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불자들은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혜로운 이에게는 재물이 약이 될 수 있지만, 어리석은 이에게는 물질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장미는 꽃이 지려고할 때, 시든 가지를 잘라주어야 옆가지에서 새순이 나와 꽃을 피우게 합니다. 아름답게 꽃은 피우고 있지만 가시를 달고 있는 것은 병충해와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입니다. 세상은 모두 그렇게 진화해 가고 있습니다.
오대산의 한암 대선사께서 젊은 시절의 경봉선사에게 글을 지어서 보내 주신 내용이 있습니다.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다.”
“조금 얻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단련하고 단련해야 옳습니다.”
보리심을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가 어려운 것은 얻은 것에 만족하고 자족해 버릴까 걱정 하시며 선지식을 찾아가서 모범을 삼고 잘못 사는 이는 경계를 삼을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셨습니다.
그래서 『열반경涅槃經』에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몇 가지 법을 구족하면 세상으로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며, 세상 법에 더럽히지 않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보살이 열 가지 법을 구족하면 세상으로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며, 세상 법에 더럽히지 아니하느니라. 무엇이 열인가. 하나는 신심이요, 둘은 계율이요, 셋은 선지식을 친견함이요, 넷은 안으로 잘 생각함이요, 다섯은 정진을 구족함이요, 여섯은 바른 생각을 구족함이요, 일곱은 지혜를 구족함이요, 여덟은 바른 말을 구족함이요, 아홉은 바른 법을 좋아함이요, 열은 중생을 불쌍히 여김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이러한 열 가지 법을 구족하면 세상으로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며, 세상 법에 더럽히지 아니함이 마치 우담바라 꽃과 같으니라.”
수행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연민憐愍의 자비심慈悲心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보리심을 일으켰다고 하셨습니다. 불자의 길을 걷고 인간학을 주창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보리심을 일으킨 것이지, 자신의 안락함을 위하여 보리를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종교의 조직도는 수평적이어야 합니다. 수직은 숨어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신심信心과 원력願力과 정진력精進力으로 회향廻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삼귀의三歸依와 사홍서원四弘誓願이 바로 신심과 원력과 정진과 회향입니다.
신심은 생명력이요, 원력은 정직함입니다. 정진은 진지한 삶이요, 소유한 자는 회향하지 못합니다. 분노심을 일으키면 번뇌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는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이지’ 하는 식의 수식어로 언어를 장식하게 되면, 의심병만 키우게 된다는 증거입니다. 스스로에게 애착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어떻게 다른 이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망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한 삶이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인식하고 자기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도리를 다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탁마하고 서로 아우르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