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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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理想은 꿈을 꾸게 하고 행동行動하게 한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보살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은 성불成佛하기 위함이요,


부처님께서 상주설법常住說法 하시는 것은 중생들에게 불종자佛種子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분논법二分論法으로 나누어보면, 세상에는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이도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나쁜 업을 짓지 않는 이와 나쁜 업을 지었더라도 이내 참회하는 이입니다. 어리석은 이도 두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업罪業을 짓는 이요, 죄업을 짓고는 감추려는 이입니다. 비록 나쁜 업을 지었더라도 이내 마음을 드러내어 참회懺悔하고 부끄러워 다시 짓지 않는 이입니다. 마치 탁한 물에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넣으면 그 위력으로 탁한 물이 곧 맑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이 걷히면 청명한 달이 비추이듯이 이내 참회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참회하는 일은 인과因果를 믿고 윤회輪廻를 부정하지 않는 이에게만 가능한 행동임을 알아 갔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젊음이요, 두 번째는 건강이며, 세 번째는 목숨입니다.
그 누구도 이 세 가지의 복력福力보다 더 큰 복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두 탐내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젊음과 건강과 목숨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것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재 젊었더라도 반드시 노·병·사老病死는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체념하듯 살아가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탐내서 될 일이 아님을 스스로가 체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건강하더라도 노병사가 있다는 것을 살피고, 목숨이 건강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아침에 일어날 때는 천만년 살 것처럼, 힘차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에 누울 때는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지 하며 자리에 들 수 있는 인생으로 이어지게 하는 생활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석천왕帝釋天王은 32상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가 부처님과 같다 합니다.
그러나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금강경의 사구게에, 형상이 부처님과 닮았다고, 목소리가 부처님과 비슷하다고 그를 부처님이라고 부른다면 그들은 영원히 여래(부처님)를 만나거나 뵐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석천왕은 목숨을 마치려 할 적에 네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옷에 때가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 위의 화관花冠이 시들고, 몸에서 냄새가 나고, 앉은 자리가 편안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世俗에서도 나이를 먹을수록 옷도 깔끔하게 입고 멋도 좀 부리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는 먼저 밥값을 낼 줄도 알아야 하며, 집에만 있지 말고 주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이웃의 길흉사吉凶事에도 반드시 찾아다니며 살아가야 한다고들 합니다.


또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신하더라도 방편을 들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방편으로 매일 걷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걷기를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꾸준하게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은 작년 2월 달부터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걸었던 걸음걸이는 살피면, 얼음판을 걷듯 발자국을 질질 땅에 끌리듯 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땅에 신발이 끌리듯 걷고는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들어가고 있는데, 걷는 걸음 수는 하루에 10km, 20km, 보통은 2만보 이상(15km) 양재천을 걸으면서 나타나는 몸의 달라진 현상이 있습니다.


마음이 허망하지 않으면 그를 이름하여 보살菩薩이라고 하였습니다.
더러는 ‘내가 부처님 계실 때, 정법시대正法時代에 살았더라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최소한 번뇌煩惱가 일어나지 않는 인생을 살았을 텐데, 말법시대末法時代에 태어나 번뇌의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 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불보살님이 말씀하시기를
‘몸은 비록 복 없는 말법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마음이 고요하여 허망함이 없으면 하고 있는 일들이 다 그대로가 보살행이라’ 하였습니다.


며칠 전, BBS불교방송에서 달라이라마 스님이 일본에 오셔서 법문하셨던 특집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달라이라마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근엄하게 법상에 앉아서 엄숙하게 선언하듯이 법회를 하는 것이 좋으냐, 인연 있는 이들을 보거나 여러분을 만났을 때 미소 짓는 모습이 좋겠느냐….”하시며 웃으십니다. 법문하시다가도 가려우시면 스스럼없이 긁기도 하십니다. 언제나 인자하신 그 미소를 잃지 않으십니다. 수천, 수만의 대중들 가운데서 법문을 하시다가도 인연 있는 이와 눈이 마주치면 법문하시다 왔느냐고 손을 흔들어 주시며 껄껄껄 웃으시는 자애로운 모습을 우리들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미소에는 업장이 녹아내리는 법력이 있으셔서 편안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미소 지으며 살았으면 합니다. 지금 그대로가 보살행이라는 가르침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물질적 세계인 현상계의 탐진치貪嗔癡 삼독심三毒心과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오욕五樂의 망상도 지혜 있는 이 변별력으로 판단하면 약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삼인행三人行에 필유아사必有我師라, 세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는데 모범적이면 본받고 어그러진 사람은 경계를 삼으면 두 사람 다 스승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은 약藥도 독毒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내가 나부터 신뢰해야 합니다. 그 신뢰가 쌓여야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실마리가 풀릴 것입니다. 상호 의존관계는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기억하고 분노하기보다는 우선 내려놓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분노하는 것은 과한 욕심과 어리석음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인지 살펴보면 분노심의 조절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분노심이 일어나면 변별력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서로 나눌 수 있을 때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값진 생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연민심(사랑)으로 지은 집은 천년을 넘게 견딥니다. 사람이 천년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신지 2,600년이 되셨는데도 부처님이 설시하신 불교라는 집은 아직도 견고한 문화유산입니다.


위대한 이가 있는 곳에는 항상 가피력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월키 오의의 『마음의 길을 통해서』에 보면, ‘꿈꾸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상은 우리를 꿈꾸게 할 뿐 아니라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어야 한다. 내일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게 인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결집이 되어 가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정화된 마음들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는 불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발행해오던 붓다지가 지령 400호가 되었습니다. 삼십년이 지난 361호부터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전자 잡지가 되었습니다.
33살의 청년과 한세대(30년)를 함께 살아온 날들의 기억들을 생각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