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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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가 가야 할 길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부처님 가르침은 성문소승聲聞小乘, 연각중승緣覺中乘, 보살대승菩薩大乘의 삼승교三乘敎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십바라밀十波羅密의 행원行願입니다. 교법으로는 인천교人天敎, 소승교小乘敎, 대승교大乘敎, 돈교頓敎, 원교圓敎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성문승은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의 안목眼目으로 깨달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가 고苦이지만, 일불승교一佛乘敎의 사성제四聖諦에는 도道 아닌 것이 없습니다. 고苦가 도道요, 집集이 도道요, 멸滅이 도道요, 도道가 도道입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다 성인聖人의 길을 가고자 하는 바라밀다의 수행법修行法입니다.
연각승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병사老病死의 우비고뇌憂悲苦惱입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업業을 정밀히 관찰해가며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보살승은 육도만행六度萬行으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의 바라밀다波羅蜜多를 실천하는 행원行願 입니다.


『화엄경華嚴經』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는 10가지 보살행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 셋째는 널리 공양하는 것.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 다섯째는 남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것. 여섯째는 늘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 일곱째는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 아홉째는 항상 중생을 수순하는 것. 열째는 지은 바 모든 공덕을 회향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에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은 불자들이 매일같이 행하고 있는 삼귀의三歸依와 사홍서원四弘誓願의 보리심菩提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불禮佛을 모실 때, 조석예불朝夕禮佛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로 시작된 예불은,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唯願無盡三寶大慈大悲受我頂禮冥熏加被力願共法界諸衆生自他一時成佛道로 마칩니다. 조석예불은 ‘불보살님의 위신력威神力과 가피력加被力으로 섭수攝受하여 나투어 주십시오.’이런 의미의 기도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시예불巳時禮佛은 지심정례공양至心頂禮供養, ‘지극한 마음으로 머리 숙여 공양을 올립니다.’로 시작해서 수아정례受我頂禮 대신 수차공양受此供養, ‘이 공양을 받으시옵소서.’로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님 전에 공양을 올리는 공양이기 때문에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명훈가피력 아닙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님 전에 공양을 올리며 결과물로 ‘뭘 주십시요.’ 그렇게 요구하는 예불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불자들은 행원을 하게 될 때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간절한 기도염원念願은 다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널리 공양하고 업장을 참회하는 것과 남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일 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수희 동참하는 일에 함께 기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다른 이가 복과 덕과 지혜를 증장하는 보살행을 하는 것을 함께 하지 못해도 그 모습에 수희동참 한 듯 기뻐한다면 승피勝彼하다.’고 한 것입니다.
또 항상 설법해 주기를 청한다는 것은,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오래 계시도록 더 많은 이들이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전에 귀의歸依하고 인과因果를 믿고 윤회輪迴를 부정하지 않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때 상주불변常住不變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입니다. 항상 중생을 수순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공덕功德을 회향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공덕은 복덕과 지혜가 구족했을 때 이루어지는 공덕림 功德林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생각을 닦아 익혀야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涅槃에 든다하신 열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그 열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열 가지를 닦기 위해서는 삼독심三毒心과 오욕락五慾樂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삼독심과 오욕락에 떨어져 있는 중생들을 부처님께서는 원숭이에 비유해서 설하신 가르침이 있습니다.
끈끈이를 이용해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숭이를 잡기 위해 널빤지에 끈끈이를 발라놓고 거기에 먹을 것을 올려놓으면 원숭이가 그걸 먹으려는 행동이 발 하나를 살얼음판 밟듯이 처음에는 살짝 대본다고 합니다.
발을 살짝 댔다가 떨어지니까 안심하고는 다른 발도 함께 대었답니다.
그렇게 양쪽 발을 한 번에 대니까 두 발이 끈끈이 판에 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그 발을 떼어내려고 손을 짚었는데 손바닥 역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머지 손도 댔다가 모두 널빤지에 달라 붙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머리를 들이대었습니다.
결국 몸뚱이는 발버둥을 치다가 끈끈이 판에 달라붙어서 그만 인간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하셨을까요?
탐貪 진嗔 치癡 삼독심三毒心은 재財 색色 식食 명名 수睡의 오욕락五欲樂의 망상으로 자유롭지 못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부처님 비유설법입니다. 우리는 그 끈끈이 판에 두 발 붙이고 두 손 붙이고 머리 처박고 붙들려 헤어나지 못하는 불편한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집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을 익히며 실천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열반을 얻을 수 있을까요?
대열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인생은 무상無常하다는 이치를 깨닫는 일입니다. 무상은 허무하거나 허전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허망하지 않습니다. 무상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다 변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지혜 있는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무상합니다. 허전하고 허망하고 허탈한 것이 아니고 무상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제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고苦 아닌 것이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고집멸도는 도道 아닌 것이 없다는 이치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은 괴롭습니까? 즐겁습니까?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까?
그렇다면 즐거운 것은 무엇이고 괴로운 것은 무엇입니까?
무상한 나는 이 몸을 말하는 것이고, 괴로운 나는 번뇌 망상을 말합니다.
자아自我는 무아無我인데, 자존심自尊心을 세우는 그 마음은 없애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존심 세우다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존심尊心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다루는 마음은 있어야 수행자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불성佛性이요, 자성自性이요, 심성心性의 본성本性이기 때문입니다.
자아自我는 스스로 나라고 하는 그 아트만은 내가 아닌 무아입니다.
나라고 하는 나는 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정한 나는 물질입니다.
이 몸을 더럽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은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선善과 악惡의 극단적 2분 논법으로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선과 악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항상한 나, 법신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즐거운 나, 열반락을 얻어야 합니다. 참 나는 부처를 늘 여여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깨끗한 법 속에서 상락아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 내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자아는 일체무아一切無我라고 했습니다.
네 번째, 먹기를 싫어하는 생각입니다. 다섯 번째, 모든 세간에 즐거움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환희법열歡喜法悅은 기쁜 것인지 육체적으로 희열을 느끼며 이를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인지는 곱씹어 볼 일입니다.
여섯 번째는 죽는다는 생각입니다. 이번에 뉴욕 원각사에서 “내가 여기를 오면 몇 번이나 더 오겠는가.” 얼마 전 왔다 간 것 같은데 2년 만에 온 것을 보면, 엊그제 원각사의 인연이 벌써 17년이라는 시간이 휙 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17년이 지나간 것처럼 엊그저께 소년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었느데, 어느덧 세월을 소진해 가는 노인으로 지금 변하고 있는 나의 모습인 것도 잠시 잠깐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은 살아온 시간에서 백년 천년 살 것처럼,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허망하고 허전해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상황이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이 가장 젊고 건강하고 소중한 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젊음과 건강과 목숨이 소중하지만, 언제까지 젊음과 건강이 있고 목숨이 유지될 것이냐고 반문했을 때, 아무도 명확하게 답변을 못 하듯이, 우리도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업이 많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알고 지은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업이 더 무겁고 크다.” 하셨습니다. 알고 지은 죄업은 참회를 하고 다시 짓지 않으려고 하니까 소멸 될 것이고, 모르고 짓는 죄업은 모르기 때문에 중첩되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그런 것들을 여의려는 생각을 한결같이 항상 지녀야 합니다.
아홉 번째는 소멸한다는 생각입니다.
열 번째는 사랑할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무것도 사랑할 게 없습니다.


청년 시절 『어린왕자』에 나오는 글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각자의 얼굴만큼 다양한 마음에서 순간순간에도 수천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것, 한결같이 지니고 산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내 복이라는 것입니다. 복이 없으면 상대방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복이 없으면 장애가 많습니다. 복이 없다는 말은 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혜 없는 사람이 과욕을 부리다가 돌부리에 넘어지는 이치와도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물이 흐르듯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풍상세월風霜歲月에 유수인생流水人生”입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유수같은 인생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뜬구름 같은 이름을 탐하는 것은 부질없이 몸만 괴롭히는 일이고 잇속을 따라서 허덕이는 것은 업장의 불에 마른 풀섶 얹어 놓는 것과 같다.”는 『선문촬요禪門撮要』의 가르침도 우리는 잊지 말고, 불교가 인생과 다르지 하니하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간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육도윤회의 업연도 사라질 것이라는 『능가경楞伽經』의 가르침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성문소승과 연각중승과 보살대승의 가르침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근기와 사회 환경에 견주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