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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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력보살(願力菩薩)과 업력중생(業力衆生)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얼마 전 미국에 살고 있는 불자로부터 결혼식 주례사를 부탁하는 전화를 받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처함이 먼저 든 적이 있습니다. 주례를 하려면 미국을 가야하는데, 순간 그 걱정이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말이 자신이 다니는 절에 불자 어른 한 분을 주례로 모셔서 내가 써준 주례사를 대신 읽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드는 생각에, 문득‘부처님을 대신해서 내가 불자들에게 법문을 하듯’그렇게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싶어서 주례사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글의 끝에 적어 보내기를, ‘남편이라는 맑고 깨끗한 거울과 아내라는 맑고 깨끗한 거울이 서로를 비추어 주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볼 수 있도록 관심과 배려로 늘 함께 한다면 한 가정의 주인으로서 큰 어려움 없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례사를 써서 보내주고 나니 그 불자가 대견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말법시대(末法時代)가 되면 불법을 듣기도, 만나기도 어렵다’고 하셨는데, 기독교국가인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불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친히 접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불자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생각하니 환희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원력보살(願力菩薩)이 가지고 있는 사유력(思惟力)과 업력중생(業力衆生)이 가지고 있는 사유력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원력보살의 사유력은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입니다. 즉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조건 없이 어울림을 가지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며 업력중생의 사유력은 늘 삼독심(三毒心)에 발목이 잡혀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나「어두운 방에 여러 가지 물건이 있다고 해도 등불이 없어서 그것이 어두움에 가리어지면 아무리 밝은 눈이 있다 하더라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비록 우리가 지혜가 있다 해도 가르침을 믿지 않으면 이런 사람은 능히 선이니 악이니 하는 변별력이 없어서 분별치 못하는 사람」이라고 ≪대비바 사론(大毘婆娑論)≫에 서

도 가르치고 있듯이,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원력보살과 업력중생의
차이점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를 쉽게 알
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배움에는 먼
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것의 옳고 그름을 관찰
해서 분별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
서 ≪열반경(涅槃經)≫
에서도「많이 배웠어도
그 근본을 잊고 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
록 조금 배웠더라도 그
도리를 이해하고 행동
하는 사람보다도 훨씬
못하다」라고 하신 것입
니다.

이 세상에는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몸과 마음이 고요한 사람이고 둘째는 몸도 마음도 번다한 사람이며 셋째는 몸은 고요
한데 마음은 번다한 사람이고 넷째는 몸은 번다해도 마음은 고요한 사람입니다.

이 네 가지 유형의 사람 중에서 어떠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인가를 물으면 대개는 첫 번
째의 몸과 마음이 고요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네 번째, 몸은 번다해도 마음은 고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맞게 생활불교를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을 만나 함께 어울림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몸이 항상 번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로서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음까지 번다해지면 안 됩니다.

몸은 번다하되 마음은 고요함을 한결 같이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그리고 그 수행과 정진을 통해 이 우주의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능엄경(楞嚴經)≫에서 우주의 진리를「어둡고 고요한 방의 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비치면 미세먼지가 가득함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맑고 깨끗함이 어둡고 침침한 허공과 만나서 부딪치고 요동치고 흔들리다가 거기에서 바람이 생겼고 바람의 마찰력으로 따뜻한 기운인 불이 생겼으며 거기에서 녹은 것은 물이 되었고 식은 것은 땅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화엄경(華嚴經)≫에서는「흙은 물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물은 불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불은 바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바람은 흙을 떠나서 존재 할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가정이 그렇고 사찰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간접적으로 맺어진 인연 속에서 혈육의 정을 나누는 사람이든 아니면 불문(佛門)에 입문해서 맺어진 인연이든 그 인연의 연결고리들은 모두 이 함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이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원력보살입니다. 그리고 그 이치를 못 보는 사람이 업력중생입니다. 업력중생이 그 이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지혜가 없고 밝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기도와 수행정진을 통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덕을 쌓아 바라밀다라를 이룰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무엇입니까? 항상된 나, 즐거워하는 나, 참나, 흔들리거나 치우치거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깨끗한 본래 나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는 나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번뇌만 끊어도 고통과 괴로움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번뇌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기쁘고 즐겁다」고도 하셨습니다. 즉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본래의 내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상일성(常一性)이 없고 주제성이 없는 나가 아니라 내가 나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그런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물질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고, 종교를 믿는 신자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본래 자기의 모습을 찾는 일에는 날로 등한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종교에서 발표한 신자 수를 합하면 전체 인구보다도 그 수가 많다는 재미있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신자 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세상은 더 살기가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물질의 풍요를 노래 부르면서 왜 정신은 더 피폐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최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 보면‘미국에서 신(神)을 부정한다는 것은 재향군인회관 앞에서 미국 국기를 태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내용의 글이 나옵니다. 또‘개인이 번뇌망상을 일으키면 정신병자라 이름하고, 다수의 사람이 번뇌망상을 일으키면 종교라 이름 하더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나를 찾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종교라는 윤활유와 신심이라는 비타민적 요소인데 그 역할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 물질 속에서의 현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진리 말고는 다 변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졌다고 그 근본마저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합니다. 같은 종교인들끼리 있는 공간에서는 서로 미소를 짓고 절대선행만을 할 것처럼 하다가도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서는 믿음과 신뢰 속에서 편안하고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 어울림을 갖는 것이 원력보살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흔들림 없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오히려 우리 사회에 병이 되고 독이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시기질투하고 권모술수를 써가면서까지 중상모략을 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이거나 어떤 신앙인이거나 항상 염념보리심해서 원력을 가지고 대중들과 어울리면서 바라밀을 닦아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고 정진이고 기도이며 생활종교인의 자세입니다.
믿음과 신뢰 속에서 편안하고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 어울림을 갖는 것이 원력보살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흔들림 없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오히려 우리 사회에 병이 되고 독이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에서「육신이 힘들면 고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고달픈 것은 정신이 힘들 때이다.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고단한 인생은 살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고달픈 인생은 살지 말아야 한다.」라고 누누이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어버이가 자식에게 무엇을 특별히 주문한 것 없이 사셨던 것처럼 각자가 타인에게 특별히 주문하는 것 없이 살아 갈 수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최소한 업력중생의 삼독심에는 빠져있지 않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무조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조건 없이 사는 인생,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을 따로 주문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 고정관념이나 허상의 그림자에 휘말려서 살아가지 않는 인생, 집에 있을 때나 회사에 갔을 때나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생, 자기의 이익에만 얽매이지 않고 늘 한결같은 훈훈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생의 그 모습이 바로 보리심을 여의지 않고 살아가는 보살의 바라밀다입니다.

E-mail : venjungwoo@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