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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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인간’의 삶 설계법

달라이라마, 실존주의 휴머니즘을 설하다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인간은 스스로 좋은 삶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삶이라고 부르지요. 그 삶 속에 내재하는 관계의 뼈대는 ‘세속적 윤리(Secular Ethics)’입니다. 윤리적 인간은 삶에서 주어지는 기회와 가능성을 해석하고 실천하면서 내일을 설계합니다. 윤리는 종교 간의 분쟁도 빈부의 격차도 인종간의 차별 역시도 나누지 않는 동등하고 평등한 인간과 인간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때문에 공동의 선을 위하는 목적으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향합니다. 오늘날 어떤 나라도 세계의 다른 부분과 고립되어 혼자의 힘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7월 6일,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8)의 생신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정치적인 문제와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외부의 소란거리들로부터 잠시 고요를 취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저 달라이라마의 호칭으로 불리는 소박한 승려일 뿐’이라며 너털웃음을 짓곤 하던 노장은, 남인도 벨라쿠피에 재건된 세라사원으로 내려가 여느 노승들의 일상과 다름없는 짧은 한 때를 보냈다.
그 즈음에 이뤄진 외신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후대 달라이라마 옹립’에 대한 물음에 달라이라마는 안경을 벗으며, “내 눈을 똑바로 보시오. 당신이 보기에 내가 지금 후대에 대한 염려를 할 시기인 것 같소?”라면서 면박을 주듯 되물으며 건강함을 과시했다. 달라이라마는 본인을 위하는 이들에게 2분짜리 영상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세라제 사원에서 제작된 이 영상에서는 본인의 생일을 축하하는 모든 지인들에게, “나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하거나 나의 장수를 기원하는 친구들이여, 부디 이 기회를 통해 보다 타인을 돕고 아끼며 자비심을 발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그러한 여러분의 실천이 바로 나에게는 가장 최고의 선물입니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티베트와 달라이라마에 관한 비보가 줄줄이 이어졌다.
중국 티베트 자치구 쓰촨 성 따우(道孚)지역에서 달라이라마 생신을 축하하던 군중들에게 중국 경찰이 총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외교부는 9일 진행된 보고회에서 이 날의 발포 사실을 부인하며 보고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 인터넷을 통해 이 날 피해자들의 참혹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전 세계에서 중국의 만행과 이중성을 확인했다.
이어서 인도 보드가야 대탑 사원지역에서 파키스탄 반 불교도 세력의 주동으로 추정되는 총 열 발의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그 가운데 대탑 부근의 신전과 까규빠의 카르마파 사원 일부가 피해를 입고 승려 일부가 부상을 당했다. 인도 현지 언론은 지난해 8월 미얀마에서 불거진 불교와 무슬림 간 충돌의 연장선으로 보도했다.
사실 그들은 반 불교도 세력이 아닌 반미 세력이라고 봐야 옳다. 미얀마에서 벌어진 불교와 무슬림 간의 유혈 사태 역시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간의 국가적 문제로 해결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미얀마 승려와 티베트 승려의 승복 색이 붉은 색으로 비슷한 것을 악용해 마치 불교 승려들이 무슬림을 집단 살해 한 것으로 사진을 조작하면서 또 다른 오해로 비틀어지고 사실은 왜곡되어 마치 달라이라마가 배후의 인물인 것처럼 탈바꿈됐다.
달라이라마가 처음 제안한 중도주의 노선은 분쟁과 격차 그리고 차별을 다독이는 대안으로써 티베트 망명정부의 지향 노선이다. 그러나 이 제안이 중국으로서는 눈의 가시인 것이 공공연히 드러났다. 지난 7월 9일자에 보도된 중국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 중앙위원회 공산당 정치국 상임위원회 유정성 위원이 티베트 자치구 간쑤 성을 방문하면서, “2009년 이후 발생되고 있는 120명에 이르는 분신사태의 원인은 달라이라마의 중도 정책에 있다.”면서, “티베트 망명정부의 중도 방안은 중국 정부의 헌법을 명백히 위반한다.”고 밝힌 것이다.
이에 인도 다람살라 주재 티베트 망명정부는 ‘중국 내 티베트인의 자율성과 주권 회복의 문제는 기필코 대화로서 해결해야 할 중도주의 문제’임을 재차 강조 했다. 이로써 중국 내 달라이라마 유화정책의 가능성을 기대했던 일부에서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온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했다. 달라이라마의 중국 방문도, 달라이라마 숭배도 모두가 한 발 앞서 기대했던 바람들의 모래성이 되었다.
한 개인의 노선이 국가의 정책에 위배될 때 그는 분열주의자가 된다. 국가 간의 분쟁은 종교 간의 갈등으로 전이된다. 무지한 인간은 방향키를 잃고 무엇이 옳은 정의인지 구분을 하기 힘들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가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그가 티베트인들에게는 바로 ‘달라이라마’이다.
여기서 묻는다. 당신에게도 정의로운 윤리적 삶의 좌표가 되어 주는 ‘북극성’이 있습니까?
<다음은 학생들과 함께한 달라이라마의 6월 법문 내용 중 일부>
이 자리에는 인도 각지에서 모인 570여 명의 학생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법회가 열린지도 오늘로 7년차가 되었군요. 티베트에는 지난 천년 동안 선지식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나누는 야단법석이 전승되어 왔고 우리가 이 자리에서 낡은 관습으로 여겨질 수 있는 우리의 고유문화를 회복하고자 하는 바른 동기를 세워 봅니다. 다시 말해, 나란다승원에서 시작된 티베트 불교의 전통을 엄숙히 이어가고자 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 젊은 여러분들은 충분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삶 속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과 쾌락거리들을 철저히 부정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올바른가를 사유할 줄 알아야 합니다. 총카파 대사께서도 이치에 어긋남을 인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음은 없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진중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분석하고 관찰해서 이치에 맞춰 논리적으로 확신을 내고 판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티베트 불교 샤캬빠의 람된 수행을 보면 붓다께서 설하셨던 경의 말씀이 옳은가를 먼저 살피고 논장을 해석하는 스승의 그름을 살펴 바른 경험을 통해 체득하도록 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바른 수행법의 모범 사례입니다.
체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이할 정도의 큰 체험과 사소한 체험이 그것입니다. 공성에 대한 지혜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을 사소한 체험으로 서서히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일상에서 탐진의 마음을 품지 않고 불방일 하다면 용수보살과 적천보살께서 말씀하신 바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새로운 인식의 눈을 떠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원하는 방향을 따르기 이전에 그 현상의 흐름을 관조할 줄 아는 깨우침의 눈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필요 가치가 전혀 없는 사소한 번뇌를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죽음의 무상함을 매일 상기하며 인간의 몸을 받음이 매우 값진 것임을 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업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으니까요.
때문에 우리는 인과의 연기법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자비로서 모든 그릇됨을 끊으신 붓다께 귀의하며, 서로 상호 의존하여 존재하기에 이것이 곧 공성이며 일체가 공하기에 상호가 의존함을 알아야 합니다. 연기법으로서 정법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니 여기 그 누가 보드가야 대탑 아래 무간지옥이 있다고 믿고 있다면 어서 무지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수시로 살펴보세요. 한 예로, 육식을 즐기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인간과 같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동물에게도 나름의 뇌 활동이 있습니다. 때문에 동물들도 고통과 아픔을 스스로 느끼는 능력이 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유목민으로 살아가면서 동물과 가족같이 지내다가도 어느 때가 되면 식량으로 육 고기를 제공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필요 수단으로 살생을 행해야 할 때 우리는 천도를 위한 기도를 항상 먼저 해왔습니다. 기도의 주된 내용에는 헌신한 자비심에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업력이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바라는 지향점입니다. 생명을 지닌 존재 가운데 인류는 70억 명에 이릅니다. 그 중에 종교를 지닌 이와 비종교인이 있고 종교인 역시도 다양한 신앙 형태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다양한 인류가 서로 어울려 공존이 가능한 것은 세속적 윤리로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 인간은 어머니의 사랑으로서 태어나 성장하는 조건 없는 자비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으로 밝게 성장하는 바에서 보여 지듯이 사랑과 자비 그리고 연민은 인간관계를 보다 유연하게 하는 촉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육의 중심이 물질 중심주의로 흐르고 그 안에서 질투와 경쟁이 파생되면서 화와 분노를 일으키고 사회적 갈등과 부조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공통된 신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지성이 오염되면서 신념도 왜곡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인간성 회복을 위한 르네상스를 서원한다면 그 중심축은 ‘세속적 윤리’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붓다의 말씀을 통해 보호를 받는 것과 같이 세속적 윤리는 인간 본연이 지닌 그 존엄을 회복시켜주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가연숙
omflower@gagyo.org / www.gagy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