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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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불교인의 자세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얼마 전 우연히 부산 해운대를 들렀다가 석양의 노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울컥 눈물부터 나왔습니다. 얼굴에 촉촉이 흐르는 물기가 느껴지자 감각적으로 주위를 먼저 살폈습니다. 통도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공인의 입장이다 보니, 혹여 누가 내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민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순간의 일이었지만, 그렇게 모습을 추스르고 다시 고개를 바닷가로 돌렸습니다. 낮 동안 세상을 밝게 비춰주던 태양은 때가 되어 넓고 붉은 꼬리를 허공에 남긴 채 수심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고, 바다는 또 빨리 들어오라고 잡아당기듯 파도를 일렁이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황홀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석양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편안하게 자연을 감상해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마음이 숙연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난 시절, 불교공부를 하면서 책을 통해 접하고 선배 스님들로부터 들었던, ‘선지식들은 해질녘이면 오늘도 하루를 그렇게 보냈는가 싶어서 두 다리 뻗고 하염 없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내 우리의 선지식들은 매일처럼 이렇게 살아왔는데, 나는 60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야 철이 들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에 시간을 너무 낭비한 것은 아닌지, 허송세월한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닌지, 좀 더 열심히 그리고 잘 살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렇게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더 열심히, 더 성실하게, 더 진지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지만, 큰 틀에서 보면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불교식으로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보살이 선지식에게 질문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스스로 알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이를 알게 하기 위해서 묻는다고 했습니다. 또 보살로 살아가는 유형도, 초발심으로만 살아가는 경우와 초발심을 가지고 근본을 잃지 않고 살아가되 보살도를 통해 중생들에게 모범을 보여 그들이 따라하도록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심으로 보면,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다 귀찮고 싫어지게 마련입니다. 또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하더라도 색안경을 끼고 보면 그 색안경 색깔대로 보이게 마련이어서 본래의 색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난 보살의 삶이 그러할 진데, 집착을 벗어던지지 못한 중생의 삶과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바꿔 설명해보겠습니다. 사람들에게‘당신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애인 등 천차만별로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만큼 산 사람은‘자기가 자기를 제일 사랑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만 남도 사랑할 수 있고,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상대방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거울에 자기의 몸을 비추어보았다고 해봅시다. 맑고 깨끗한 거울은 현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를 비춰줍니다. 그러나 볼록렌즈나 오목렌즈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변화시켜서 보여줍니다. 거울에 때가 묻어있어도 제대로 비춰지지 않습니다.
그렇듯 맑고 깨끗한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야만 거울을 통해서 보이는 자기의 모습을 스스로 보고 장단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수정하거나 다듬어야 할 부분을 정확히 판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삼라만상 두두물물 중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무상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한시도 쉼 없이 변하고 있는데, 무엇인가에 집착을 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찌 보면 중생심으로야 무엇엔가 집착을 하게 마련이지만, 그 집착도 집착을 할 만 한 것에 해야지 본래 집착할 수 없는 것들, 한결같지 않고 변화무쌍한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을 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옆집의 식사초대를 받아서 갔더니, 그 집의 음식이 자기 집에서 먹는 음식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 음식을 먹어보니 자기 집 음식보다 훨씬 맛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주인에게“어떻게 음식을 만들었기에 이렇게 맛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기를, “예, 간단합니다. 시장에서 참깨를 사다가 볶고 빻아서 보자기에 꾹짰더니 참기름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그것을 음식마다 쳤더니 이렇게 맛이 좋아졌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그니는 오자마자 곧바로 시장으로 가서 참깨를 사왔답니다. 그리고는 참깨를 볶아서 기름을 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텃밭에 뿌리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됐다. 그 사람은 지혜가 없어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수고를 했는데, 나는 볶은 참깨를 밭에다 심어 놓았으니 앞으로는 볶을 일 없이 수확해서 그대로 짜기만 하면 된다.”라고 했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당연히 그 밭에는 잡초만 우거졌겠지요. 그리고 그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바보라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근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밭에 건강한 종자를 다시 뿌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볶은 참깨는 밑거름이 되어서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인생에 비유해보면, 참깨는 본래의 착한 성품인 선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존재하는 자체로써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가끔 지하도를 걷다보면 바닥에 통하나 놓고 절하는 이를 보게 됩니다. 어느 때는 그 사람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승적도 없고 스님도 아니면서 스님 복색을 하고 불교를 팔아먹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찌 저럴까 싶어 꾸짖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불자가 그런 사람이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불현듯‘오늘 며칠이지? 오늘 초사흘 신중기도 회향하는 날인데 깜박 잊었었네.’라고 생각하고 발길을 사찰로 돌렸다면 그 불자에게 그 사람은 선근공덕을 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이 모든 사람들의 눈을 거슬리게 한다 할지라도 인연에 따라서 나의 복밭이 될 수도 있고 선지식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죽은 소에도 우황이 들어 있지 않더냐!”라고 가르치셨던 것 입니다.

인도의 풍습에는 소를 잡지도 않고 먹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사람들은 소가 살아있을 때는 일이라도 시키고 쓸모가 있지만, 죽은 소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선근이 있는 자가 지혜가 있어서 안목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취사선택만 잘 할 수 있다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따로 있지 않고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까마귀 검다 말며 해오라기 희다 말라. 검은들 모자라고 희다고 남을 소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 하더라.」
또 서양의 시 중에 제목이「그래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 제목을 응용해보자면,
「만일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봉사를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해라.
그래도 봉사를 해라.
그래도 불사에 동참을 해라.」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착한 일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손길을 보내고 발길을 내딛는 것입니다. 생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 속담에「말 안하면 귀신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분명한 표현과 분명한 행동과 분명한 상식의 범주 안에서 보편적인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이 생활불교인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착한 일을 하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된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일 것입니다.
만일 내가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착한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누군가 짊어지고 가야할 일이라면, 그 짐을 스스럼없이 짊어지고 갈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또 ≪능엄경(楞嚴經)≫에「견견지시 견비시견(見見之時見非是見)」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법문을 응용해서 말한다면「쓸 것을 쓰는 것은 쓰는 것이 아니다. 줄 것을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갈것을 가는 것은 가는 것이 아니다. 갈 때는 가고 올 때는 올 줄 알아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절에 가고, 기쁜 마음으로 직장에 가고,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가고, 기쁜 마음으로 이웃에 갔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야 합니다. 진정한 불자는 기쁜 마음으로 절에 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삶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생활불교인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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