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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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마음을 가진 불자가 되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대보적경大寶積經』에 “마음은 바람과 같다. 마음은 그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마음은 머무르는 일 없이 일어났다가 이내 곧 사라져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생각이든 번뇌에 찌든 생각이든,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이라, 하루에도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일들이 모두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갑오년 윤달의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를 매주 수요일마다 올리고 있습니다.
생전예수재를 풀이해 보면 생전에 미리 닦아 복덕과 지혜를 저축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생전예수재를 지내면서 영가천도를 함께 하게 되는지 궁금해 하는 불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윤회輪廻 하고 있는 훗날, 영가 후보자입니다. 이 세상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갈 생명체는 없습니다. 생전예수재에 영가를 함께 모시는 것도, 작은 인연이라도 맺었던 모든 유정무정有情無情의 인연들, 먼저가신 부모형제 처자권속과 함께 생전에 미리 올리는 재齋입니다.
오늘 불자들이 한 권씩 전해 받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보면, 부모님의 은혜가 열 가지로 상세히 설해져 있습니다.
첫째는 태중에서 열 달 동안 길러주신 은혜(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입니다.
열 달 동안 태중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인연은 헤아릴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태중에서 열 달 동안 길러졌던 새 생명의 아이를 우리나이로 포함시켰으나 언제부터인가 서양식 개념으로 나이를 낮춰 부르기 시작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태母胎에서 함께 있었던 시간들을 반드시 내 나이에 합산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해산할 때 고통 받으신 은혜(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입니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경구警句가 있습니다. 뒤돌아서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네 어머니는 아기를 낳으러 방으로 들어갈 때, 토방에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가면서 반드시 뒤돌아 보며, ‘내가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는 고통과 괴로움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일이였는지를 단편적으로 표현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 번째는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으신 은혜(생자망우은生者忘憂恩)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데도 아이를 가슴에 안을 때의 기쁨은 환희법열歡喜法悅 이였습니다. 네 번째는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서 먹여주신 은혜(연고토감은咽苦吐甘恩)입니다, 다섯 번째는 마른자리 젖은 자리 갈아주신 은혜(회건취습은回乾就濕恩)입니다. 여섯 번째는 젖을 먹여 길러 주신 은혜(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입니다. 일곱 번째는 더러운 것 씻어주시던 은혜(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이고, 여덟 번째는 먼 길 떠난 자식 걱정하신 은혜(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입니다. 모친인 노 보살님은 연세가 90이신데, 평소에는 저에게 전화도 안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절에 있으면서도 공양시간에 후원에 안 내려오면 전화벨이 울립니다. 아홉 번째는 자식을 위해 모진 일도 다 하시는 은혜(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이고, 열 번째는 평생 동안 사랑하시는 은혜(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입니다. 이것이 『부모은중경』에 나오는 어버이의 열 가지의 은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촌동생이자 가까이에서 보필하던 아난존자에게 ‘내가 중생들을 보니 비록 사람의 모습은 이어 받았으나 마음과 행동은 어리석고 어두워서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크신 은혜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위배하며 어질고 자애로운 마음이 전혀 없어서 효도를 하지 않고 산다.’고 하셨습니다.
「보현행원품」에 “공양 가운데 가장 으뜸인 공양이 법공양法供養이라.” 하셨지만, 법공양과 다름없는 공양이 부모님께 효순 하는 공양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이야말로 공양 가운데 가장 으뜸인 법공양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풍장風葬으로 장례를 치르는 지역을 지나가시다가 뼈 무덤을 보시고 예禮를 올리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서 여쭙습니다.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께서 어찌하여 뼈 무더기에 예를 올리시며 절을 하시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부모 아닌 이가 어디 있겠느냐.”
모든 중생을 다 어버이로 생각하면 자비심과 연민심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크고 무겁고 흰 뼈는 남자의 뼈이고 가볍고 작고 검은 뼈는 여자의 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화장터에 가보면 법문을 많이들은 보살님들의 뼈는 흰데, 세상 남자들의 뼈는 도리어 더 새까맣게 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자들은 부귀영화에 찌들고, 일에 찌들어 살면서 부처님 법문도 듣지 않고, 기도정진도 안 하고, 수행도 안 하기 때문입니다. 불자(보살님)들은 절에 와서 법문도 듣고, 수행정진을 하기 때문에 뼈가 희다 할 것입니다.
 『숫타니파타』에서 이르기를, “일어나 앉아라. 그대들에게 잠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독화살에 맞아 고통 받는 이에게 잠이 왠말인가.”
여기서 독화살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얻기 위해서 일념으로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느 불자가 공양봉투 하나를 주었는데, 제가 “귀한 곳에 쓰겠습니다.” 하니 적어서 부끄럽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40년 전 군에 있을 때 라디오에서 나오던 단막극이 생각났습니다.
엄동설한 청계천 교각 밑 음산한 곳에서 구걸을 하던 사람이 서울 시민들을 향해 울부짖듯 소리치는 대목입니다. “나는 착한 사람은 필요 없다고. 욕을 해도 좋으니까, 여기다 동전 하나라도 주고 가는 사람이 제일 좋다고.”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 울리고 있습니다.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누지 못하는 이는 받는 고마움을 모릅니다. 받기만 하면서 사는 이는 나눔의 기쁨을 모릅니다. 나눔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주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 속에 수없이 많은 일들을 만나고, 부딪치고, 받아들이면서 열두 고갯길을 넘어가듯,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고갯길에서 우리는 그 동안 무엇을 했고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과 함께 가려 하는 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인생에 남은 것은 무엇이며 남길 것은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인생에 단 하나뿐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수정할 수 있는 노력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더렵혀지는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흙탕물도 가라앉히면 맑고 깨끗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신심이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변에 있는 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항상 내면의 내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내관사유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애민섭수哀愍攝受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심을 가지고 다독거려 주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늘 살피고 보듬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마음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따뜻한 기운은 우리들을 스스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신행생활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생전예수재까지 올리면서 무엇을 그렇게 목말라 하십니까. 그저 무거운 등짐을 정상頂上에 올라가 내려놓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본래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성이 본래 착한 사람들인데, 함께 더불어 어울림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불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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