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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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없는 이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없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서四時節序중 오늘은 입춘立春입니다.
어제는 보름법회를 마치고 구룡사로 돌아오면서 차창 밖으로 스치는 나무들이 새싹의 움을 틔우기 위해, 파란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나무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문득, 입춘이 지나면 많은 바람이 불겠구나. 우수雨水 경칩驚蟄에 바람이 부는 것은 겨울에 가물었기 때문입니다.


겨울철에 땅이 얼기를 반복하면 나무뿌리가 들떠있어서 바람이 불어와서 나무뿌리를 흔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겨울철에 많은 눈이 오게 되면 우수 경칩이 되어도 바람은 불지 않습니다. 이미 눈(雪)의 무게가 땅을 다져 놓았기 때문에 바람이 불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청년시절, 『화엄경華嚴經』에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속의 흙은 물 기운이 없으면 분진이요, 물은 불기운이 없으면 얼음이며, 불은 바람 기운이 없으면 불(火)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은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흙 기운이 함께하지 않으면 바람이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은 쉽게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수 경칩에 바람 부는 것은 겨울철 가뭄이 심했기 때문이요, 우수 경칩에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은 겨울철에 눈비가 많이 왔기 때문이다’는 선조들의 가르침으로 자연의 오묘함에 옷깃을 여미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모든 것은 인연법因緣法에 의해서 연기緣起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노병사老病死도 그렇습니다. 삼재三災는 노, 병, 사입니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라 하였습니다.


삼재는 쓰나미와 같은 것입니다. 금년의 삼재가 어찌 토끼띠, 양띠, 돼지띠만 해당 되겠습니까? 수재는 늙음(老)을 의미합니다. 화재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재난입니다. 병炳들어 힘든 것은 바로 불(火)의 부조화 현상입니다. 풍재는 죽음(死)을 의미합니다. 숨을 안 쉬면 살 수 없습니다. 모태母胎에 의탁해서 의식주를 해결하다가 세상에 나와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그 숨쉬기를 멈추는 날 생사生死 또한 마감하는 날입니다.


입춘에, 삼재팔난三災八難을 소멸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이처럼 이어지는 12년 간격의 삼년 거리로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전후좌우前後左右를 살피며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을 현재의 모습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선조先祖들의 지혜와 방편이었습니다.


지난 법문에 하심下心하고 인욕忍辱하는 것이 수행이요, 정진이라 하였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수행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악하지 않다는 것이고 착하게 산다는 것은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을 일으켜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세상을 만나게 되고, 우리들 마음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으면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종범 스님은 ‘화를 내되 화를 내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것만큼, 화를 내세요.’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화를 내는 것은 불합리한 횡포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화를 내려거든 사랑하는 것만큼만 화를 내 보세요.


구룡사 법당에는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이 계십니다. 보살의 머리 위에 열한 분의 관세음보살 상호가 있는데, 앞쪽은 인자한 자비의 미소상입니다. 그러나 뒤쪽의 보살은 귀면상鬼面相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생심이 작용하면 변덕스럽고, 횡포를 부리며, 짜증을 내고, 그로 인한 갈등을 겪는 인간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형상입니다.
십일면 보살의 뒤편에 있는 귀면상은 자비의 분노상입니다. 사랑의 분노상입니다.
중생들이 화를 내는 것은 욕구, 욕망, 욕심으로 가득 찬 노여움의 분노심입니다.
보살의 분노는 자애로운 연민심으로 일깨워주는 모습입니다.


불교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2600년 동안 불교는 종교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인류역사상 많은 종교들은 전도傳導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한 번도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런 불교에 귀의한 우리는 얼마나 복된 인생이며 선근이 많은 분들입니까.
그 길을 걸어왔던 불교는 앞으로도 세상의 자양분이 되고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인과를 믿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불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구룡사를 비롯한 도심 포교당에서는 매년 해오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들과 나눔을 함께하기 위해서 공양미를 모으고 있습니다.
종교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 진실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정직함과 성실함의 융합체가 진실입니다. 종교를 말하면서 굳이 ‘정말’이라는 미사용어를 수식하며 그런 언어들을 사용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음식을 만드는데 식재료를 조미료 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삼시세끼 밥 먹으면 될 텐데 영양제를 음식물보다 더 많이 먹으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소르본대 교수인 프랑수아 슈네 교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정리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자신의 삶을 만드는 존재이다. 매 순간 인간은 행위를 통해 자신의 미래의 삶을 창조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만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지 못하면 훗날 허전하고, 허망하고, 허탈해 하며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어느 노부부는 황혼에 이혼하기도 하고, 서로가 내 인생을 보상하라, 내 청춘을 돌려 달라고들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매 순간 행위를 통해서 나 자신의 미래의 삶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교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생각이다. 내 삶, 내 인생, 내 생활을 만드는 것은 오직 생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제팔 아뢰야식 속에 담긴 마음으로부터 칠식, 육식, 전오식 등으로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프랑수아 슈네 교수는 영국의 대처수상이 평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던 내용과 흡사한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상기 시켜주었습니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영국의 대처 수상 -


이것은 바로 불교정신인 인간학 입니다.
생각, 행위, 습관, 성격, 운명이었습니다.


행동은 속과 겉이 다르게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화나는데 웃는 사람은 상대하지 말아라. 화가 날 때 화내는 사람이 화가 날 때 웃는 사람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화를 내지 않고 사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심하고 인욕하면 화 낼 일이 없습니다. 삼독심이 없으면 분노하고 화낼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정혜 삼학으로 규범 속에 살면 몸이 고요해집니다. 선정을 닦으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지혜를 닦으면 의심이 끊어집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으로 화낼 줄 아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화를 내는 것은 폭력 입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오로지 생각이다. 사람이 뿌린 생각의 씨앗은 행위라는 열매를 맺는다’ 하였습니다. 생각의 열매는 행위요, 행위의 씨앗을 심으면 습관의 열매를 거두고, 습관의 씨앗을 심으면 성격의 열매를 거두며, 성격의 씨앗을 심으면 운명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내 운명은 내가 만듭니다. 사주팔자는 업業입니다. 수행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함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불교를 통해서 자작자수自作自手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며,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이치들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프랑수아 슈네 교수는 ‘불교를 주목하라. 불교는 비폭력적이다.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한다. 그래서 세계질서의 혼란에 가장 적합한 이념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낸다면 불교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유일하게 세계가 미래의 어떤 모습을 띄게 되든 반드시 그곳에서 자양분과 울타리와 천연한 빛을 발현하는 곳에 포함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과학과 철학이 발전할수록 불교는 더욱더 꽃피워질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에 머무르는 순간 내 청춘, 내 인생, 내 삶, 내 생활을 꾸미려고 합니다. 허전한 마음, 허망한 마음, 허탈한 마음은 물의 부조화 현상으로 늙는 것을 그렇게 허탈하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훈장처럼 받아들이는 지혜를 터득하였으면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한번만 접으면 보살입니다. 한걸음씩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면, 수행하는 불자가 될 수 있습니다.


권청합니다. 어려운 일은 내가 나서서 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도록 건네주었으면 합니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은 내가 스스럼없이 나서서 하고 그 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그 자리를 넘겨주고 허허로이 무거운 짐 내려놓고 벼이삭 익을 때 부는 바람을 느끼면서 남은 시간을 잘 살았으면 합니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적은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는 것만큼,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성이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명업식無明業識이 무거워 어둡더라도 지혜광명을 밝히는 순간, 어둠이 사라지는 그 이치를 살필 수 있었으면 합니다.


asanjungw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