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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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바탕화면 살피기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孟子曰  맹자왈
孔子登東山而小魯 공자등동산이소노
登太山而小天下  등태산이소천하
故 觀於海者 고 관어해자
難爲水  난위수
遊於聖人之門下者 유어성인지문하자
難爲言  난위언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자님께서 노나라의 동산에 올라가 보시고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고
태산에 올라가 보시고는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
그러므로 바다를 구경한 사람에게는
큰 물 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노닐어 본 사람에게는
훌륭한 말 되기가 어렵다
맹자 진심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화엄의 무한대바다에서 노닐어 본 사람에게는 여간해서는 훌륭한 물줄기가 되기 어렵다. 능대능소能大能小가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그 고탄력의 신축성 넘치는 바다를 구경한 사람이 어떻게 김빠져버린 맥주 맛에 취할 수 있겠는가.
화엄의 우주바다에는 거대한 우주항모도 떠있고 지구보다 몇백 배 더 큰 항공모함도 떠있다. 그런가 하면 멸치보다 작은 조각배도 떠있고 풀잎도 떠있고 풀잎 뒷면 한쪽 구석에 붙어있는 조그만 먼지도 떠있다. 그 먼지의 친구 먼지도 담배를 피우면서 앉아있다. 그 먼지는 항공모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항공모함도 그 먼지를 무시하지 않는다. 우주바다 전체가 때로는 먼지 하나 속으로 소풍을 가기도 하고 먼지가 순식간에 우주허공 가득한 입체 크기로 커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커진다는 생각도 없고 작아진다는 생각도 없다.
원효스님은 대승기신론 해동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欲言大矣  욕언대의
入無內而莫遺  입무내이막유
欲言微矣  욕언미의
抱無外而有餘  포무외이유여
크다고 말하고자 하니
무내 속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자 하니
무외를 감싸고도 넉넉하게 남는구나


무내無內는 안이 없는 것으로 가장 작은 것을 말한다. 조그만 진딧물도 바깥 몸이 있고 몸속이 있는데 이 무내는 그 속이 없을 만큼 작다. 작다고 할 수 없는 작은 것이다. 원효스님은 지금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크기도 하지만 작아질라치면 저 작은 무내 속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배율이 높은 현미경을 만들어서 가장 작은 것을 관찰한다 해도 우리 마음은 다음 찰나에 그 작은 것 속에 쏙 들어가도 남음이 없을 정도로 작아질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큰 것을 생각해내고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그 다음 찰나에 우리 마음은 그 큰 것을 넉넉하게 감싸고 오히려 널널하게 남음이 있다. 어린 시절 큰 숫자 부르기 놀이를 할 때 어떤 친구는 “니가 부르는 숫자에 더하기 1”이라고 말해서 이 놀이에서 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상대 친구가 기를 쓰면서 아무리 큰 숫자를 불러도 그 친구는
천연스럽게 대꾸하곤 했다.
“더하기 일”. 옆에서 구경하면서 저 친구도 숫자만 부르지 말고 ‘더하기 일’ 하는 친구에게 ‘니가 더하기 일’ 한 숫자에 ‘더하기 이(2)’ 하고 말하면 될텐데 저렇게 애를 쓰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편든다고 싸움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고전의 구절을 읽으면서도 현실 생활에서는 더러 마음이 답답해질 때도 없지는 않다. 어떤 경우에 ‘너무 예쁘고 너만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요구하는 것처럼 “선생님만 존경합니다” 하고 말해주길 바라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런 분위기가 감지될 때 참 가슴 속이 답답해진다. ‘우리 스님만 큰 스님이다’고 하는 이야기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할 때 본인의 속은 또 얼마나 답답할까 걱정하느라 조금 답답해진 때도 있다.
‘선생님만 존경하고 선생님만 훌륭합니다’ 하는 말은 바르셀로나 축구 선수들 전체가 한 게임에서 11명이 합심해서 죽기 살기로 상대팀과 경기를 하고 있는데 ‘오로지 메시만 훌륭하게 경기를 잘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팀플레이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요즘은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도 다 잘 아는 사실이다.
누가 봐도 팀플레이를 해야 할 때인 데 각자만 훌륭하다는 생각으로 전체 시스템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경우가 여기저기에 많지는 않지만 또 없지도 않다.
성인의 문하에서 노닐어 본 사람에게는 내가 그 사람에게 해주는 말이 여간해서는 좋은 말이 되기가 쉽지 않다.
그 사람의 고막 진동 주파수가 이미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의 에너지가 진동시켜 놓은 고막의 주파수는 어지간한 주파수에는 쉽게 반응을 하지 않는다. 눈높이가 높아져 있고 귀높이가 높아져 있고 마음의 키가 커져있는 사람에게 ‘선생님만 훌륭하십니다’ 하고 말하면 고막과 안구와 마음의 안테나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 된다.
‘너만 예쁘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발바닥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선생님만 훌륭합니다’ 하는 말도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내면의 수행이 필요한 이유이다. <색성향미촉법>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안이비설신의>의 진동 주파수가 신축성이 높아져야 한다. 내 감각기관의 신축성이 떨어지면 외부환경의 자극에 쉽게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마음이라는 바탕화면에 너무 많은 화면을 띄워놓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검색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왜 이렇게 느린거야 하고 느린 원인을 찾는 화면을 또 여러 개 띄우느라 바탕화면에 깔리는 화면의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급기야 평면에만 깔리는 것이 아니라 총천연색 우주 입체적으로 온갖 화면을 띄운다. 내가 띄운 화면이 이렇게 많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과열된 컴퓨터가 여러 차례 경고 화면을 띄운다. 허나 경고 화면은 바탕에 깔려있는 하고 많은 화면에 가려져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바다라는 화면을 구경해본 사람의 눈과 성인의 말씀을 들어본 사람의 고막에는 아무리 흥미로운 화면도 시선을 끌거나 귀를 솔깃하게 하기 어렵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이라는 바탕화면에 어떤 화면을 띄워놓고 있는가. 바이러스가 깊이 잠식해 들어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모든 화면을 다 내릴 일이다. 본연의 화면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저절로 떠
올라서 안구를 정화시켜 주고 고막을 신선하게 회복하게 해주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