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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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불교佛敎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의불지교依佛之敎이며 성불지교成佛之敎입니다.
신앙적信仰的으로는 불보살이신 삼보를 의지하는 종교요, 신행적信行的으로는 깨달음을 이루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에 우리들에게 45년 동안 팔만장교八萬藏敎를 설시說示해 주셨습니다.
그 깨달음은 “마치 금광원석을 캐서 그것을 열처리하여 잡철이나 이물질을 덜어내면 거기에서 순금이 나오는 것과 같다. 깨달음이란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춰져 있는데, 이물질인 번뇌를 제거하면 본래 본성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그렇습니다.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미 다 갖춰져 있었는데 무명업식無明業識에 의해 가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은 시비상是非相입니다. 그러니 “까마귀 검다 말고 해오라기 희다 말라. 검은들 모자라며 희다고 남을 소냐.” 시비하고 분별하는 것은 우리에게
보살菩薩이 될 수 없는 장애障碍입니다. 나누어보면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은 사상四相으로 드러납니다.
번뇌와 망상은, 타던 불이 꺼지면 끓던 물이 잠잠해 지듯이 사상四相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마치 불을 밝히면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망상으로 드러나는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의 오욕락五欲樂은 집착執着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심청정心淸淨이 시불是佛이요, 심광명心光明이 시법是法이며, 처처무애정광處處無碍淨光이 시승是僧이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연등축제와 세계 간화선 무차법회는 세계평화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대법회였습니다. 30여만 명의 불자들이 운집된 야단법석野壇法席에 불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과 외국인들이 함께하는 모습은 한국불교의 장엄한 법회요 세계인들이 인연을 맺고자 하는 불교문화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길손들이었습니다.
광화문 무차법회에서 종정스님께서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네팔의 지진참사와 세월호 침몰의 아픔과 세계 각국의 전란戰亂과 재난災難으로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염원念願의 기도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범부중생凡夫衆生인 것은 나와 나 아닌 것,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중생과 중생 아닌 것, 나의 수명과 남의 수명으로 구분 짓는 것이 번뇌가 되고 망상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아상我相을 없애려면 탐욕을 여의면 됩니다.
성냄을 여의면 인상人相이 사라지고, 어리석음을 여의면 중생상衆生相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없이 오래 살려는 집착만 내려놓으면 수자상壽者相이 사라집니다. 번뇌와 망상은 반야지혜를 닦으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 가까이에서 심염송心念誦을 하였습니다. 염불念佛은 글자 그대로 불법승 삼보에 대한 염불, 염법, 염승입니다. 그 염불은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기쁜 마음으로 할 수도 있고, 간절한 마음으로도 할 수 있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일념一念으로도 하는 것입니다.
염불기도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두참구話頭參究도 무념무상입니다. 초심자들은 번뇌와 망상을 줄여 나가는 방법으로 수식관을 하기도 하고, 백골관을 하기도 합니다만, 비파사나 수행법은 여래선如來禪입니다 여래선은 묵조선默照禪이며 반야지혜般若智慧를 닦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법은 조사선祖師禪입니다.
조사선祖師禪은 간화선看話禪이며 선정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조선과 간화선을 둘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정삼매禪定三昧와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어찌 둘이겠습니까? 화두도 어찌 보면 망상입니다. 그런 망상은 큰 참구법이 이루어지면 소소하게 일어나는 망상들을 사라지게 합니다. 비유 하자면 불의의 사고로 몸을 다쳤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평소 같으면 그 상처는 아프고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상처가 생기게 되면 작은 상처들은 아픈 것도 아닙니다.
태어나는 모양, 늙어가는 모양, 병드는 모양, 없어지는 모양, 이 네 가지 모양은 우리들로 하여금 범부로부터 수다원須陀洹에 이르게 합니다. 만일 마음을 거두어 잘 생각하면, 이 네 가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만나게 될 때에도 몸과 마음은 고통과 괴로움은 있겠지만, 두려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 달 초하루는 구룡사 주지 소임을 맡은 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출가한 지는 50여 년에 30년을 구룡사에서 살았습니다. 저와 그동안 맺은 인연으로 그 많은 불사들을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가회동에 있던 구룡사 주지는 소임을 맡던 날의 기억들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 됩니다.
출가한 스님으로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한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나마 함께 할 수 있었던 불자들이 가까이에 있어서 참으로 복된 인생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바른 안목이 없어서 끊임없는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맑고 깨끗한 안목을 가지게 될 때, 사라지게 됩니다. 일체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참 부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종단에서 모금하고 있는 네팔 지진 피해 돕기에 구룡사와 여래사에서는 제일 먼저 구호성금 1억 원을 냈습니다. 홍법문화재단 이름으로 종단에 전했습니다. 1억 원이면 큰 돈입니다. 그 돈을 천 원씩 모으려면 10만 명이 동참해야 하는 돈입니다. 만 원씩 모으려 해도 1만 명이 동참해야 됩니다.
불자들의 시주금을 소임자 스님들은 절약하여 모은 삼보정재인 성금을 네팔에만 그렇게 낸 것은 아닙니다. 마산 창원에 홍수로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을 적에도 구룡사에서는 1차로 1억을 종단에 내고 다시 모금불사를 하여 3,300만 원을 통도사에 전하면서 “우리는 모으고 총무원장 스님과 통도사 주지스님은 피해 현장에 가셔서 직접 전달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성금을 전달하고 나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전생에 티베트 스님이었나요, 네팔에 살던 스님이었는가요?”
네팔, 인도, 티베트를 좋아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안 가본 중남미의 아이티 지진 때도 1억 3천만 원을 모아서 보냈습니다. 지난해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도 컴퓨터 40대를 사서 여러 초등학교에 두 대씩 전하기도 하고 초등학교 복구에도 군종교구에서 법사님들이 팔걷고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스리랑카, 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중국, 인도…. 여러 나라들이 있습니다.
홍법문화재단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루어가고자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전생에 그쪽에 살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태어나신 네팔이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일화世界一花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광화문에서 세계평화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무차대회 또한 우리는 승가공동체이기 때문에 함께한 야단법석이었을 것입니다.


켄트케이스의 「그래도」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라.
착한 일은 말이 아니라 행동 입니다.
마음을 주고 손길을 보내고 발길을 내딛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누군가가 해야 합니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된다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asanjungw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