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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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정진修行精進하는 불자佛子가 되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불교의 4대 명절인 성도재일成道齋日입니다. 음력으로 납월臘月 8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부다가야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신 날입니다.
부처님의 생애를 8폭으로 조성하여 모셔져 있는 탱화를 이름하여 석가여래 팔상도釋迦如來八相道라 합니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조성되어져 있습니다.
도솔천 내원궁에서 호명보살로 계시다가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시는 모습은 불종자佛種子를 반복해서 열매와 씨앗으로 촉수를 틔워가는 모습입니다.
가비라 국에는 서울에 남대문과 동대문 같은 4대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아픔과 괴로움을 목격하다가 북문에서 한 수행자의 편안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 길을 떠납니다.
비유하자면 촉수를 틔운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리게 한 다음, 새로운 땅에 옮겨 심는 출가자의 모습으로 비춰볼 수 있겠습니다.
출가 이후 6년 동안 수많은 선인들과 고행자들을 만나며, 고행하시다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삼매에 들어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훗날, 그 6년간의 고행기간을 이렇게 술회하시었습니다.
“머리를 만지면 파뿌리 뽑히듯 하고, 얼굴을 만지면 덜 익은 오이 쥐어뜯어서 그늘에 말려놓은 것 같고, 배를 만지면 등이 잡히고, 갈비뼈는 배 틀의 추 같고 엉덩이는 망가져 사막에 사는 낙타의 발바닥과 같았다.…” 하셨습니다.
극단적인 고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단면을, 소치는 수자타로부터 유미죽을 얻어 잡수시고 기력을 회복하며 니련선하 강가에서 몸을 씻고 정신을 가다듬고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로 가서 길상초를 한 줌 얻어 바닥에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교진여 등 다섯 고행자들은 타락했다며 떠나버렸습니다. 
부다가야에서 도를 이루신 후 녹야원 사슴동산으로 타락했다며 떠나버린 아약교진여 등 다섯 명의 고행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법을 설하여 귀의시키고, 이후 45년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법을 전하신 후 사라쌍수 나무 아래서 열반에 드시는 모습이 부처님의 생애입니다.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신 것은 불종자의 씨앗을 심었다면, 출가는 움을 틔워서 그 싹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고 깨달음을 이루신 성도일은 꽃을 활짝 피운 날이며, 그 연꽃으로 45년 동안 열매를 맺어 승가 공동체를 이루어 주시다가 쿠시나가라에서 2월 보름날, 청정법신불로 우리 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4대 명일은 더욱 중요한 날입니다.
우리 인생에 어떤 날인들 중요하지 않은 날이 있겠습니까? 좋을 때만 내 인생이고 기쁠 때만 내 인생은 아닙니다. 괴롭고 슬플 때도 내 인생입니다.
움직임이 없는 시간, 잠을 자는 그 시간까지도 내 인생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인본주의人本主義라 합니다.
서양의 종교들은 신본주의神本主義입니다.
지구가 생성된 이래 50억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끊임없는 성주괴공
成住壞空과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두 발로 걷게 되는 유인원이 진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자연에 적응하며, 힘과 힘의 대결로 인간들이 지구를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 예나 지금이나 삼재팔란
三災八難은 어찌해볼 수가 없습니다. 지진과 화산, 태풍과 홍수는 지금도 인간의 힘으로는 재앙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수만 년 동안, 종교는 샤머니즘으로 발현되면서 오늘날의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 많은 이들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주었지만, 서양의 종교는 밖으로 절대자를 구하고 불교는 내면적으로 탐구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오직 마음작용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것도 일체가 유심인 것을 깨치신 것입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가던 길을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 온 것도 일체유심조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수행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천신天神으로 태어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수행환경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공부, 정진, 수행한다는 것은 콩나물에 물주기와 같습니다.
콩나물은 물을 안 주면 잔뿌리가 많이 생깁니다. 콩나물에 잔뿌리가 많으면 맛도 없습니다. 그래서 콩나물을 키울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잔뿌리도 생기지 않습니다. 너무 길이가 길어도 맛이 없습니다. 작다고 해서 맛있는 콩나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은 콩나물에 물주기입니다. 콩나물은 썩혀도 안 되고, 잔뿌리가 많아도 안 됩니다. 수행자의 번뇌 망상煩惱妄想은 콩나물의 잔뿌리와 같습니다.
“수행은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다.” 하였습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이것을 신, 해, 행, 증信解行證이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이해와 실천으로 증득해가는 것으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한 없는 인생을 살아가며,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인 인과
因果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면 천당 가고 올바르게 살면 극락에 간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 다만 그것뿐이다. 한 번의 잠으로 일체의 고뇌를 다 끊어버릴 수 있다면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완성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잘 살지 못한 이가 죽으면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보다 더 못한 세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복된 인생은 여한 없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일 것입니다.
‘죽음은 해탈解脫이요, 열반涅槃이요, 삶의 완성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을 잘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것이 곧 해탈이요, 그것이 열반이요, 그것이 곧 삶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들은 삶의 완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있는 것은 비극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죽음을 따로 두지 말고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이고 정진이며 삶의 완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콩나물을 키우는 이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계율을 닦는 것은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몸은 중요합니다. 그렇다보니 중생들은 오직 육신이 근본이고, 사대가 제일이고, 몸이 영원할 것이라 애착하며 거기에 집착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대육신四大六身은 무상한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대육신은 그릇과 같아서, 그릇이 견고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거기에 무엇을 담아놓고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선정지혜禪定智慧를 닦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규범 속에서 법대로 살면 몸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지혜를 닦는 것은 의심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통찰력이 있어서 변별력이 생겨 판단을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통찰력이 없습니다. 눈에 안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도를 닦는 것은 본성을 보기 위함입니다. 나를 보기 위함입니다. 불성을 본다는 것은 보리심菩提心을 얻기 위함입니다, 보리심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열반을 얻는 것은 중생들의 생사와 온갖 번뇌 망상을 제어하기 위함입니다.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아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행자의 길을 가기 위함입니다.


asanjungw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