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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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하는 부처님

신규탁
한국선학회 회장


절에 오래 다닌 사람들도 절에 어떤 부처님 불상을 모셨고, 또 그렇게 형상을 모신 이유를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점은 불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간과되기 일쑤이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초기불교의 모습을 담고 있는 한문 번역 ‘아함부’ 경전 내지는 팔리어로 기록되어 전승되는 ‘니까야’ 경전 속에 등장하는 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이다. 이런 초기 경전에는 오직 석가족의 출신으로 종교적 체험을 얻는 고따마싣달타만이 부처이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대승불교운동의 산물로 만들어진 대승경전에는 다양한 부처님이 등장한다. 그 이름도 무수하여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불一佛 사상에서 다불多佛 사상 쪽으로 진행된 셈이다. 이런 대승불교의 다불사상이 중국에 전파되고, 또 세월 속에서 중국에서 선종이 창안되어 유행되면서 모든 중생이 부처이며 모든 행동이 부처의 행동 즉 불행佛行이라는 사조도 널리 퍼졌다.
중국 불교와 밀접한 영향을 맺었던 조선의 불교도 역시 다불신앙이다. 이제 이 문제를 경전에 근거해서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이때에 필자가 활용하는 불경은 『대승기신론』이다. 이런 논의를 불신론佛身論이라고 학자들은 부르는데, 불교 내의 학파마다 또 학승들마다 약간씩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느껴진다. 필자도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간략하게 필자가 정리한 것을 먼저 소개하여, 불경이나 불교전문 서적에 나오는 불신 관계 문장 이해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진리 그 자체는 불생불멸하고 원래 존재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 진리를 몸으로 하는 부처의 존재를 착상하게 되었다. 그런 착상의 결과가 법신法身 관념을 만들어내었다. 그 관념을 형상화하여 조각으로 드러낸 것이 비로자나불상이다. 한편 이런 진리의 부처님 즉 법신은 세상과 관계를 맺고 현상 속에 자신을 드러내는 속성이 있다는 착상도 했다. 즉 법신이 세상과 상응한다. 또는 세상사에 호응한다. 이렇게 응應하는 부처님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런 부처님을 응신應身이라 한다. 이렇게 세상에 응해야 인간은 부처님을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들이 수행을 갖추어 일정한 능력이 갖추어지면 그 정도에 따라 반응 또는 감응한다. 즉 인간의 수행을 전제로, 수행의 대가로, 되갚아 응應하는 경우를 보신報身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인간들의 수행과 관계없이 법신 속에 갖추어진 자비가 전적으로 원인이 되어서 세상사에 호응한다는 발상이 바로 화신化身 관념이다. 요약하면 응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상응신이 보신이고, 하응신이 화신이다. 우리가 보통 3신이라 할 때에는 법신, 보신, 화신을 지칭한다. 그래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라고 염송한다.


1. 진여 법신
‘진여의 본바탕과 속성’은 모든 범부·성문·연각·보살·부처 어느 경우라도 늘지도 줄지도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거나 소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궁극적으로는 항상 변함이 없어서 본래부터 (진여의) 성품 속에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말하자면 (진여의) 본바탕에 큰 지혜 광명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自性淸淨한 마음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며, 상常·낙樂·아我·정淨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며, 청량하여 불변하면서도 자유자재한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여의 본바탕과 속성’에는)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불리不離·부단不斷·불이不異·부사의不思議한 불법佛法을 간직하고 있고 결코 부족한 것이 없는 기능 때문에 여래장如來臧이라 하며 또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고도 이름 한다.


2. 진여 법신의 작용


① 법신의 작용


또한 진여의 작용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여래가 본래 인지因地에 계실 때에 대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교화하시려고 큰 서원을 세워 모든 중생계를 끝까지 해탈시키고자 하시되, 겁劫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상相을 내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중생과 자신의 몸이 진여라는 측면에서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큰 방편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에 원래부터 불가사의한 갖가지의 업의 작용이 있어서 진여와 더불어 모든 곳에 편재함을 알면서도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으로서 지상智相의 몸이다. 제일의제第一義諦에는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어서 (모습이나 작용으로) 드러남(施作)이 없지만, 다만 중생이 보거나 들으면 이익을 얻기 때문에 용用이라 말할 뿐이다.


② 응신과 보신의 작용


진여의 작용에 두 가지가 있다.


(1) 첫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한 것으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응신應身이라 한다. (그들은) 이것이 전식轉識으로 인해 나타난 것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고, (응신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모습(色分齊)를 취하지만 이는 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2) 둘째는 업식業識에 의한 것이다. 이는 모든 보살이 초발의初發意로부터 보살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본 것이니 이를 보신報身이라 한다. 그 몸에 무량한 모습이 있고 모습에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 의보依報도 셀 수 없는 갖가지 장엄이 있다. 여러 장소에 다양하게 나타나 일정한 모습(分齊相)이 없으며, 계셔야 할 곳에 늘 상주하셔서 훼손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은 모두 여러 바라밀 등의 오염 없는 수행(無漏行)의 훈습과 (진여 본각의)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인해서 성취된 것으로 셀 수 없는 즐거움의 기능(樂相)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 한다.
또 범부에게 보이는 것은 곧 추색.色인데, 6도 중생이 보는 게 제각기 달라 즐거움의 기능樂相을 받지 못하는 것이 여러 가지 종류이므로 응신應身이라 한다. 다음 초발의 보살 등은 진여 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보신을 약간만 보는데, (보신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장엄한 색상色相 등등의 현상이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어서 일정한 모습(分齊)을 떠났으며, 오직 마음에 의하여 나타나면서도 진여와 동떨어진 게 아님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도 스스로를 분별하고 있으니 아직 법신法身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초지인 정심지淨心地에 오르면 보는 것이 더욱 미묘하여 그 작용이 더욱 훌륭해진다. 그리하여 보살지의 마지막 단계에 오르면 보는 것이 완전해진다. 만약 업식이 없어지면 보는 견상見相이 없어지는 데,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모습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③ 법신과 색신의 관계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묻는다. “만약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답한다. “곧 이 법신은 색의 본바탕이기 때문에 색을 나타낼 수 있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色과 심心은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색의 본성은 곧 지智인 까닭에 색의 본바탕에는 형체가 없는 것을 두고 지신智身이라 이름하며, 지성智性은 곧 색色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 한다고 하는 것이다.
나타낸 색이 일정한 모습이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시방세계에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과 무량한 장엄을 나타내되 각각 차별되어 모두가 일정한 모습이 없으면서도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는 심식心識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가 가지고 있는 자재한 작용의 기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