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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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선의 자존심을 세우다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1390년 가을. 9월 10일. 고려의 공민왕이 즉위한지 20년째 되던 해다. 불심佛心이 깊은 왕이 나옹懶翁화상이 머물고 있는 광명사廣明寺를 찾았다. 절에서 그동안 수행하고 있던 스님들의 공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공부선功夫選이다. 나옹은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고금의 격식을 깨뜨리고 범성凡聖의 자취와 유래를 다 쓸어버린다. 납자의 목숨을 끊고 중생의 의심을 떨어 버린다. 잡았다 놓았다 하는 것은 손아귀에 있고 신통 변화는 기세에 있으니, 삼세三世의 부처님이나 역대의 조사님들이나 그 규범은 같도다. 이 법회에 있는 여러 스님들은 바라건대, 사실 그대로 대답하시오.


나옹의 이 물음에 제대로 답하는 스님은 없었다. 어떤 이는 몸을 구부리고 땀을 흘리면서 “모른다.”고 했고, 어떤 이는 이치에는 통했지만, 일에 걸리기도 했고, 어떤 이는 너무 격렬하여 실수하기도 했다. 왕이 서운한 기색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 환암이 나옹 앞에 나가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을 물으니 막힘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나옹은 흡족해하며 회암사로 돌아갔다고 한다.
환암 혼수가 한국불교에서 지닌 가치는 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불교는 그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오랜 탄압과 수탈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뿐 교단과 선교학禪敎學의 체계적인 계승이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법맥法脈의 체계를 세우는 일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불교의 중흥조인 청허 휴정과 그의 제자들은 태고 보우太古普愚를 해동선불교의 초조로 삼고 환암 혼수를 전법傳法제자로 올렸다. 그러나 나옹 혜근懶翁惠勤 역시 환암 혼수의 스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환암 혼수와 나옹의 인연은 두 사람이 여러 차례 서로 만나 도道의 요체에 대해 물었고, 나옹은 이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 산형山形의 주장자 등을 대사에게 신표로 주기도 했었다. 나옹 혜근과 태고 보우는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선진적인 선법禪法으로 수행하고 한 소식을 일깨운 인물들이다. 때문에 한국 선불교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이 법맥문제는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수수께끼와도 같다. 세간의 일은 진실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여하튼 환암 혼수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정착으로 선불교가 이 땅에 알려진 이후 조사선의 가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고려 말 선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웅존자智雄尊者 환암 혼수는 휘가 혼수混修이고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菴이다. 성은 조趙씨로서 아버지가 현감으로 있던 부임지인 오늘날 지명으로 경북 예천 용주에서 1320년 3월 13일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숙령叔.으로 사헌부 소속 정6품의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경慶씨로서 사대부 가문이었다. 그는 어려서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를 많이 하였다. 집안에서 출가하면 연명할 수 있고, 큰 인물이 된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12세 이후 계송繼松스님을 따라 상좌가 되었다. 이후 22세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31세에는 어머니의 병환소식을 듣고 가까운 경북 성주星州에서 5~6년을 지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법화경』으로 명복을 빌고 나서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식영 연감息影淵鑑 스님을 만나 『능엄경』의 25가지 방편수행을 수학하여 그 진수를 얻었다.
『능엄경楞嚴經』은 밀교사상과 선종의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이다.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타의 제자인 아난다阿難陀가 마등가 여인의 주술에 의해 마귀도에 떨어지려는 것을 부처의 신통력으로 구해낸다. 그리고 나서 선정의 힘과 백산개다라니의 공덕력을 찬양하고, 이 다라니에 의해 모든 마귀장을 물리치고 선정에 전념하여 여래의 진실한 경지를 얻어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후의 목적임을 밝혔다. 따라서 이 경은 밀교사상이 가미되기는 하였지만, 선정禪定이 역설되고 있기 때문에 밀교 쪽보다는 선가禪家에서 환영을 받아 중국에서의 주석가들은 모두 선문의 비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환암이 수학한 『능엄경』의 25가지 방편수행은 25가지 원통圓通인데, 그 가운데서도 관세음보살이 수행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은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으로 소위 듣고 있는 자신의 성품을 다시 돌이켜 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예컨대 25성인이 각기 자신이 깨친 원통방편을 설명하자 문수보살에게 그 시비를 가려보라고 한다. 그러자 문수보살은 차례로 육진오입六塵悟入·육근오입六根悟入·육식오입六識悟入·칠대오입七大悟入이라는 25성인의 견해에 대하여 평가하면서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이야말로 최상의 방편임을 찬탄한다.


대중과 아난이여. 그대들이 전도하여 듣는 바탕을 돌이켜서 듣는 자성을 되돌이켜 듣는다면 그 성품은 최상의 도를 이루게 될 것이니 원통의 진실이 그와 같다. 이것이 바로 미진불微塵佛이 열반에 들어간 하나의 길이었다. 과거의 모든 여래도 이 반문문자성 수행으로 여래를 성취하였고, 현재의 모든 보살도 지금 각장 원명圓明한 수행문에 들어가며 미래의 수행자들도 마땅히 이 수행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나도 이 수행법에 의지하였듯이 관세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핵심은 각자가 지닌 자성을 돌이켜 듣는 것이다. 이것이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여래들이 여래를 성취한 이유이고 보살과 수행자들 역시 이 수행법에 의지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능엄경』은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잘못된 수행으로 나타나는 선병禪病과 그 퇴치방법 등은 어느 경전 못지않게 자세하고 효과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지침서로서 『능엄경』은 선사뿐만 아니라 교학敎學을 공부하는 스님들과 사대부 계층에서도 널리 활용되어 그 사상적인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선교학의 통합을 강조했지만, 여전히 불교계의 갈등을 봉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나옹 혜근과 태고 보우가 공부하고 돌아온 중국선이 유행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환암은 두 스승의 영향과 오랫동안 『능엄경』을 통한 수행에서 그만의 개성을 지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후에도 왕명으로 광암사 등 여러 곳의 사찰에서 능엄법회를 개설하여 50일 동안 천재지변이 없도록 기원하고 많은 명망 있는 유학자들과 고승高僧들에게 설법하기도 하였다.
공민왕을 이어 즉위한 우왕은 환암에게 광통무애원묘대지보제선사廣通無碍圓妙大智普濟禪師라는 법호法號를 내렸다. 64세 때는 조정의 뜻을 국사에 책봉되었는데, 국사의 호는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오불심종흥자운비복국리생묘화무궁도대선사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知雄尊者」였다.
그가 73세로 입적했을 때는 8일 동안 앉은 자세로 모셔지다가 9월 25일 충주의 청룡사靑龍寺 연회암宴晦庵 북쪽 산기슭에서 다비에 부쳤다. 조선의 태조는 부음을 듣고 애도하면서 시호를 보각普覺이라 하고 탑호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