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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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의 무자성 ‘오직 알 뿐’

보고 보이는 바가 실제 하지 않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실제 한다 여기는가.
고유한 자성이란 있지 않으니.
오로지 상호 의존할 뿐이네.


상호 의존하는 연기법은 삼라만상 섭리의 뼈대입니다. 때문에 우리 불교도는 이를 설하신 석가모니 붓다를 일체 중생의 스승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의존하여 발생하기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습니다. 대상에서부터 실제 하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 보이는 것뿐만 아닌 내가 보는 것 또한 동시에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언제나 내가 본 그대로 고정불변하지 않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대원만수행과 마하무드라에서 금강승 수행의 논리 역시 연기법을 토대로 합니다. 의식은 ‘오직 알 뿐’이라는 정광명을 고유의 성품으로 삼습니다. 보리도차제론 관품에서는 대상에 입각한 논의를 서술합니다. 닝마빠와 까규빠에서 기준으로 삼는 연기법의 논리는 전적으로 금강승 수행에 입각한 바로써 ‘오로지 알 뿐’에 근거합니다.
절대적인 존재란 마치 공화와 같습니다. 자성 공의 존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고정된 바가 없음을 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의존적 존재라는 이유로 극단적인 양변을 여읠 수 있으니 그 자리가 바로 중도입니다. 공성으로 인도하는 수승한 환멸의 연기법을 통해 무수히 많은 성자들이 궁극의 지혜에 이르렀습니다. 상호 의존할 뿐이라는 것은 실제 함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개념에 확신이 들면 붓다께서 설하신 바의 정수로써 세간을 대할 수 있게 됩니다.
한때 쫑카파 대사께서 가동에서 문수보살을 직접 뵈었을 때 설화입니다. 대사는 당시 수행의 근기에 준하는 공성의 견해를 점검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문수보살은 보다 깊이 경전과 논서를 사유하도록 당부하셨고 대사는 바로 무문관으로 들어가 집중 수행에 임했습니다. 대사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러한 결정을 우려했으나 정작 대사는 결심한 바대로 깊은 무문관 수행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조언을 따라 제자 호 닥빠 남걀을 비롯한 선택된 제자를 대리고 만다라 공양 수행을 하셨습니다. 얼마 후 대사는 꿈을 꿉니다. 불호논사께서 불호논을 머리 위에 얹어주신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대사는 바로 중론의 18장을 해석하였습니다. 그 직후 깨달음의 노래를 지으셨으니 그것이 바로 연기찬탄송입니다.
사바세계의 논리는 이름으로써 마치 실제 하는 것만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아집이 증장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가르침 가운데는 특별한 의미로 ‘실제가 있다’ 혹은 ‘오온은 나라는 주체의 짐과 같다’로 설한 예시도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경우는 제자의 자량에 준한 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공성의 도리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이름조차도 실제 할 수 없음을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출가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배워 실천하는 것. 서원을 세운 바 윤회의 그 마지막 날까지 오직 정진만으로 한 순간도 게으름 없이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붓다의 수승한 가르침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종교 역시 존중하십시오. 달라이라마 본인은 단 한 번도 타 종교를 비방하거나 좋다 나쁘다와 같은 잣대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한번은 가톨릭 사제와의 만남에서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중생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왜 지옥을 만들었으며 이 세상에 고통을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정리하고 싶다고 성경의 계시록을 통해 말씀하실 정도로 이 세상은 참으로 부조리하며 혼란스럽습니다. 붓다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존재하지 않는 실제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인과법에 의해 상호 의존하는 생멸법을 알아차리라고 설하셨습니다. 때문에 불교도의 수행법으로써 마음 챙김이 상당히 강조되었습니다. 세상살이 윤회하는 속에서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고 다스려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단지 인연법에 의해 이름 지어진 것일 뿐입니다. 일체법은 가유假有입니다.
저는 청변논사의 논리 체계를 상당부분 수용하는 편입니다. 전 세르꽁 도르제창 린포체께서 관련한 법문을 사사하셨습니다. 비록 부인이 있었으나 수행력이 무척 깊은 분이셨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비할 바 없는 광대한 이치를 설하신 티베트 불교의 17논사 교사 분들께 예경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