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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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교철학의 골격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은 대기설법이다. 상대의 수준이나 그가 고민하는 문제의 성격에 맞추어 설법을 하셨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과 증세에 따라 약을 다양하게 처방하는 것에 비유되기도 했다. 큰 목적에서 보면 의사는 질병의 경우는 치료를 목표로 하여, 고통의 경우는 그것의 해소 내지는 약화를 목표로 하여 의료행위를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중생들의 고통치료 내지는 해소, 내지는 감소, 이것을 목표로 다양한 말씀을 하신다. 때문에 병과 그에 따르는 처방을 함께 보아야만 의사 내지 부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불교에는 경전의 수도 매우 많고, 그 경전 속에 전하는 이야기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 극락세계는 서쪽으로 아주 멀리 한 참을 가면 있다고 말하는 경전도 있고, 그런가 하면 극락세계는 자기의 마음에 있다는 경전도 있다. 또 인도의 사라쌍수 밑에서 부처님이 열반하셨다고 하고, 또 지금도 부처님께서 영상회상에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신다는 경전도 있다. 어느 말이 맞는지 도저히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의 이런 태생적인 이유 때문에,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도 그것을 분석해보고 종합해보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그렇게 하는 철학적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철학 작업의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 학파이고 교파이고 종파이다. 이런 작업은 일정한 시간과 구성원 집단의 축적을 거치면서 역사로 정착하게 된다. 때문에 한국불교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전통을 고찰해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불교는 대승의 전통에 서 있다.
대승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하더라도, 이 경우의 부처님은 법·보·화 3신을 한 몸에 지니신 분이다. 즉 북방불교도들이 믿는 부처님은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갖추신 신통한 분이시다. 반면 남방불교 소위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6년간의 수행을 거쳐 마침내 깨달은 존재인 부처가 되신 분이다. 그러다보니 남방불교에서는 북방처럼 부처님에 대하여 신격화 된 요소가 비교적 적다. 그 결과 상좌부에서는 깨달은 후에 약 45년 보여주신 석가모니의 인간적이고 성숙한 윤리적 삶을 중시하게 된다. 어느 쪽이 옳다는 식의 배타적 평가는 적어도 신앙의 당사자에게는 의미가 없다. 서로가 인정하는 역사적 가치가 다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확인하고, 그 전통에 기초하여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는 부처님은 누구이고, 또 어느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여, 더 나가서는 어느 종단에 의지하여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할까를 선택하야 한다. 대승불교를 구분할 때에 인도의 경우 크게 두 전통으로 나눈다. 하나는 중관 계통의 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유식 계통의 불교이다. 전자는 일체의 공성과 무성 무아의 측면에서 보살행을 강조하고, 후자는 아뢰야식설에 입각한 요가 명상을 강조한다.
한편 중국 등 한자 불교권에서는 분류법이 약간 다르다. 중국불교에서는 교리에 담겨있는 주장하는 내용을 기준으로 분류했다. 그것은 첫째는 공종이고, 둘째는 상종이고, 셋째는 성종이다. 이 중에서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행하고 넓게 퍼졌던 학설은 성종이다. ‘성종’은 앞에다 ‘법’을 덧붙여 ‘법성종’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법성종의 중심 개념은 두 말 할 것 없이 ‘법성’이다. 중생의 심신작용에는 불생불멸하며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본바탕이 있는데 이 본바탕을 법성(法性, dharmat.)이라 한다.
중생의 본바탕인 법성에는 불가사의한 업의 기능과 청정한 지혜의 기능이 있다. 법성은 존재하지만 묘한 방법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묘유妙有’이며, 또 공한 존재이만 참된 공이므로 ‘진공眞空’이다. 우리 마음의 본바탕에는 이런 두 요소를 다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보통 ‘일심一心’이라고 한다. 모든 연기 ‘현상’은 모두 공하고 무상하지만, ‘일심’은 진공묘유인 상태로 항상 작용하고 있다. 이런 ‘일심’ 위에 선악 시비가 펼쳐지는 것이다.
연기의 소산인 시시비비 선악 등의 ‘현상’에 휘둘리지 말고, 저마다 간직한 일심의 본바탕을 저마다 몸소 체험하여, 그 본바탕에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능력을 한껏 누리면서 세상살이하자는 것이 법성종의 핵심 철학이다. 이런 철학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일체유심조’이다. 『화엄경』은 이런 사상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방대한 경전이다. 한국불교는 이런 전통에 입각하여 염불도 하고, 교리 공부도 하고, 참선 수행도 하고 있다.
본래 청정하건만 무상한 현상에 휘둘리는 원인은 ‘어리석음’ 때문인데, 시간을 한정하지 말고 쉼 없이 저마다의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한다.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생에, 그렇게 하기를 세세생생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법성종의 가르침은 철학을 넘어서는 종교이기도 하다. 사후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정토 신앙도 이런 철학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어리석음’이 제거 되는가? 염불하는 쪽에서는 불보살의 거룩한 형상이나 말씀에 집중하여 다른 생각을 쉬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삼매를 체험하라고 한다. 참선하는 쪽에서는 자신의 ‘일심’을 반조하라 가르치면서, 그 방법으로 ‘화두’에 집중하여 강한 의심을 내라고 가르친다. 그런가 하면 교학(우리나라는 모두가 화엄교학)에서는, 저마다의 본 바탕인 ‘일심’을 관찰하면서 더불어 6바라밀 내지는 10바라밀 더 나아가서는 『화엄경』에 펼쳐지는 보현의 보살행을 실천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이런 전통에서는 본 바탕인 ‘일심’을 의인화 하여 ‘비로자나(Vairocana)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부처님은 모양이나 색깔이나 음성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법(法, dharma)을 몸으로 하는 법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부처는 모두 화신이다. 그 대표적인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법신을 믿는 불제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재가 불자’이고, 또 하나는 ‘출가 불자’이다. 법신을 믿는 점에서는 두 불자는 모두 같지만, 절에 살면서 보살행을 하느냐, 가족과 함께 살면서 보살행을 하느냐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사람들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생명 운동의 긴 역사’ 속에 놓인 당사자 본인의 업력의 차이일 뿐이다. 차별은 아니다. 법성을 믿고 보살행을 하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생명 운동의 긴 역사’ 즉 윤회 속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깨달음 그 자체 즉 ‘법성’과 하나가 된다. 이 일은 ‘서원’과 ‘실천’ 즉 보현보살로 대표되는 실천과 원력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바른 공동체에 먼저 입단한 ‘출가 불자’와 ‘재가 불자’가 동등할 수는 없다. ‘재가 불자’는 ‘출가 불자’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지도를 받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재(齋 법회)에 동참하여 정기적으로 대승계를 점검하는 일이다.
그러면 부처가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대답은 이렇다. 이제까지 우리는 생명체들의 축적된 역사 속에서 각종 번뇌에 끌려서 수동적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번뇌와 맞선다. 그리하여 수동적이고 자연적이었던 삶과 결별한다.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이제는 번뇌의 힘이 아닌, 보살 서원의 힘으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세상을 살면서 그 자신의 본성을 실현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깨침을 완성한다. ‘축원문’ 맨 끝의 “세세상행 보살도世世常行 菩薩道 구경원성 살바야究竟圓成 薩婆若”가 바로 그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자기 본질을 완성하는 과정의 부산물로 너와 내가 행복해진다. 이런 한국불교의 전통은 너와 나의 평화와 행복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상에서 나오는 부산물이다. 궁극의 목표는 일체의 번뇌의 장애를 소멸시켜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바탕인 일심을 ‘깨쳐야 하고’, 그것도 완전하고 철저하게 깨쳐야 한다. 이런 깨침을 ‘돈오’라고 한다. 이렇게 ‘돈오’하기 위해서는 티 없는 무심한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 『금강경』에서 나오듯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의 일체 전도된 생각을 떨쳐 없앤 상태에서 바라밀 실천을 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금강경』도 많이 독송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