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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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존립에 헌신하다

득통 기화(得通 己和, 1376~1433) ①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우리 역사에서 고려高麗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는 단순히 왕씨王氏에서 이씨李氏로 바뀌는 역성易姓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동안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정신세계와 생활풍속을 지배했던 이데올로기 역시 교체되었다. 공자와 맹자의 전통유학을 더욱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체계화시킨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이 조선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기초이자 중심이 되었다. 때문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들이 지배이념으로 수용한 성리학은 이전 왕조였던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 모순과 문제를 개혁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결국 주자성리학은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정당화시키는 역사적 의미 역시 확보할 수 있었다.
기화己和는 스님의 신분으로 고려 말 조선 초라는 격동기를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고려 우왕 2년(1376)에 태어나 조선 세종 15년(1433) 55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일생 동안, 왕조교체가 일어났고, 자신의 삶과 정반대로 진행된 사상교체도 진행됐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도 성균관 유생에서 이단異端으로 비난받았던 출가수행자로 변해 있었다. 결국 그의 인생은 이른바 불교가 쇠퇴하고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의 가치체계가 정치이념과 사회규범 전반에 걸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성균관成均館의 전도유망한 유생儒生에서 불가佛家의 수행자로 삶이 바뀌면서 세속의 모든 영화로움을 등진 그의 인생은 부처의 골수를 훔치기 위한 몸부림과 함께 온당치 못한 당시의 불교비판과 탄압에 항거하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기화는 원래 고려 말 시대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개혁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본디 충주忠州사람으로 아버지는 유청劉聽이다. 집안은 고려가 건국되면서부터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고려초기부터 대표적인 외척가문外戚家門으로 성장하였지만, 고려후기에는 고려에 비판적이었던 신진사대부 성향이 강했다. 이들은 중앙이 아닌 지방을 근거지로 대부분 지방의 관리층이나 독서인층이다. 또한 불교보다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학자계층이었다. 이른바 학자적 관료였던 것이다.


반궁泮宮에 들어가 공부할 때는 하루 수천 개의 말을 기억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일관一貫의 도를 통할만큼 명민하였으며, 장차 북쪽을 향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널리 알리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며, 인륜을 세울 때는 반드시 주周·소召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제자와 주변인들이 본 출가 전 기화의 모습이다.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배워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고자 한 것이 일차적인 꿈이었고, 충과 효를 자신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정에 들어가서 중국 주나라 무왕武王을 도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했던 주공단周公旦과 소공석召公奭을 능가할 만큼 새로운 조선왕조에 헌신하고자 하였다.
전도유망했던 그가 나이 21세(1396) 때 별안간 관악산 의상암義相庵에서 출가한다. 그의 어록에 의하면 자신에게 유교경전을 배우던 스님이 “천하만물을 인자하게 대하라는 맹자가 왜 천하만물 가운데 하나인 소와 닭을 죽여 칠십 노모를 공양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한동안 해답을 찾지 못했다. 스님은 공자의 말은 인仁을 설명하면서 살생殺生을 저지르니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얼마 후 기화는 삼각산 승가사의 노스님에게 불교에 불살생계不殺生戒가 있음을 듣고 의문을 해결했다고 한다. 출가하기 전 기화는 유교경서에 두루 통해 강론講論할 때면 학관學官들에게 “궁리지학窮理之學’이라 불릴 만큼 그의 주자학 이해가 심화되었고, 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적극적이었음을 생각했을 때 인仁에 관한 불합리성의 모순은 그로 하여금 동료의 죽음만큼이나 자신을 회의에 잠기게 했을 것이다. 인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을 얻은 것은 단순히 지식의 폭을 넓힌 것이 아니라 그의 수신修身과 평천하平天下에 대한 인식의 근간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출가시出家詩에서 “성리학에서 불교를 헐뜯는 말만 듣고 부처님의 옳고 그름은 알지 못하였더니/ 몇 해 동안 되풀이해 가만히 생각하다가/비로소 진실을 알고 돌아가 의지했네” 라고 하였다.
관악산 의상암에서 출가한 기화는 그 이듬해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친견하고 그의 법문을 듣고는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었다. 무학은 1373년 왕사王師가 된 나옹 혜근의 법法을 이어받았으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 살며 낙성회落成會를 열 때 수좌首座로 초청받았으나 이를 사양했다. 그는 1393년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鷄龍山 및 한양漢陽을 돌아다니며 지리의 형세를 보고 마침내 한양으로 정하는데 찬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기화는 중국의 평산 처림→나옹 혜근→무학 자초→득통 기화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법맥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태고 보우의 법맥과는 다르다.


기화는 선禪수행만을 강조하던 당시 불교계의 경향과는 달리 교학敎學연구에도 활발한 관심을 보여 『금강경金剛經』·『원각경圓覺經』·『법화경法華經』과 같은 여러 경전에 자신의 견해를 담아 저술하기도 하였다.
만약 문장에 집착하면 줄기만 보고, 근원을 잃어버린 것이요, 만약 문자를 버리면 근원만 보게 되어 줄기를 잃어버리게 되니 근원과 줄기를 함께 잃어버리지 않아야 깨달음(法性海)에 들어가느니라.(기화의 『금강경오가해설의』 중에서)
기화는 깨달음의 줄기와 근원을 얻기 위해서는 선수행과 아울러 교학에도 소홀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선과 교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특히 『금강경』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금강경』은 “더없이 단단하고 지혜로워 깨달음의 언덕에 이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처님은 제자 수보리에게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생각과 행동으로는 참다운 보살이 될 수 없으며, 그와 같은 태도로 육바라밀을 행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요컨대 일체의 대립을 소멸시킨 무상無相과 무주無住의 경지에서만 진여법신眞如法身을 볼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우선 중국 선종의 대표적인 5인이 주석을 첨가한 『금강경오가해』에 자신의 견해를 수록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금강경』이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성격을 지닌 아상我相·인상人相과 같은 번뇌를 반야지혜般若智慧로서 끊게 하고, 수승한 지혜로서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의 설법을 전달해주는 것에서 경전이 지닌 탁월함을 찬탄하였다. 기화의 『금강경오가해설의』는 이후 한국불교의 중요한 저술로 자리 잡았고, 지금도 전국 사찰의 강원講院에서 중요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기화는 선을 수행하면서도 염불행자였다. 염불은 부처님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정토왕생을 간절히 바라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하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일반적이다. 그는 정토와 아미타불이 서방세계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모든 개체에 두루 이루어져 있고, 부처가 될 종자가 모든 사람마다 이미 갖추어져 있어서 밖에서 찾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는 염불결사를 통해 불교가 급격히 쇠퇴해가는 당시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