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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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수행자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고려후기 대표적인 신료이자 학자였던 이색(李穡, 1328~1396)은 구곡 각운을 두고 “대저 구곡은 양반의 후예라 타고난 기질이 벌써 보통 사람과 달랐고, 도학道學으로 닦은 공부가 원숙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스님은 남원출생으로, 속성은 유柳씨, 호는 구곡龜谷, 각운覺雲은 법명이다. 「동사열전東師列傳」을 비롯한 여러 책들은 구곡이 태고 보우의 법을 이은 환암 혼수(幻庵 混修, 1320~1392)의 제자라고 했지만,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구곡과 친분이 있었던 이색은 「남원부 만행산 승련사기南原府萬行山勝蓮寺記」에서 구곡이 생몰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졸암 연온拙菴 衍溫의 친족으로 조카가 되고 불법으로는 후계자라는 것이다. 때문에 환암 혼수의 제자라고 한 것은 후대의 법맥을 정리할 때 일부러 태고 보우의 법손으로 확정한 탓일 것이다. 1372년(공민왕 21) 궁궐 내원당內願堂 감주監主였던 구곡이 왕에게 청하여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간행했다고 했지만, 이것 역시 분명치 않다.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 실제 사실이 바뀌고, 없던 일이 다른 일과 섞이고 다른 사람의 행적이 마치 내일인 것처럼 되어버린다.
『동사열전』은 구곡이 “윤소종尹紹宗이 임금에게 간하여 찬영粲英스님을 내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잠적하여 은둔 생활을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공양왕 2년 정월에 왕이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정몽주가 진언하기를 “부처의 가르침은 친척을 하직하고 남녀 사이를 끊고 동굴에서 홀로 앉아 풀잎으로 옷을 삼고 나무뿌리로 양식을 삼으며 공空하여 적멸함을 관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니, 이것을 어찌 평상의 도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왕은 승려 찬영을 맞이하여 왕사로 삼으려 하였기 때문에 정몽주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왕은 바야흐로 불교에 미혹되었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에 임금이 조계 승려 찬영을 맞이하여 왕사로 삼으려 하자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璘, 좌상시左常侍 윤소종尹紹宗 등이 궁에서 엎드려 간하니, 왕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찬영은 숭인문崇仁門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고려사』 중에서)


주자성리학의 시선으로 쓴 『고려사』의 내용이다.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가 되기도 하였다. 역사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지만, 붓을 든 자의 태도가 좌우한다. 때문에 역사는 ‘권력의 시녀’요, ‘이긴 자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경연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이다. 고려 말이라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유학자들은 원나라로부터 수입한 주자성리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불교는 이 세상에 아무 쓸모없고 심지어 혼란스럽게 한다고 믿었다. 유학을 강론하는 경연의 자리인 만큼 불교는 훌륭한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는 요동정벌군의 장수였던 이성계李成桂, 조민수曺敏修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정변政變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직후여서 조선건국에 찬동한 유학자들의 위세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침 왕이 당대의 고승이었던 찬영(粲英, 1328~1390)을 왕사王師로 삼으려 했지만, 윤소종 등의 반대로 돌아간 일이 벌어졌다. 찬영은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菴, 속성은 한씨, 양주 사람이다. 14세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로 출가하여 보우普愚의 제자가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왕명에 의하여 설법하였고, “승록사僧錄司의 일이 중대하니 평범한 승려에게는 맡길 수 없다.”는 왕의 뜻에 따라 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이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 직책을 사양하고 석남사石南寺·월남사月南寺·신광사神光寺·운문사雲門寺 등에 머무르며 선법禪法을 선양하였다. 1383년 3월 우왕은 찬영을 왕사王師로 봉하고 충주 억정사億政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공양왕 역시 왕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신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구곡은 이 사건으로 은둔하여 피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 어떤 이는 이것은 소은小隱이라고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구곡 각운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본분사라 할지라도 세상의 이목을 끌만한 일이라면 추호도 이름 석자 드러내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 같다. 찬영 스님의 일을 경험하고 무섭고 두려워서 세속을 등졌다기 보다는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부류들의 불교비판 논리가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교학禪敎學을 발전시킬 수 있는 수행력 있고 명망 있는 스님들은 예외 없이 은둔하여 교세는 더더욱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귀곡龜谷
화和한 기운은 하늘에 있으며 허령지각虛靈知覺은 물건에 있다.
오직 신묘한 용도用途를 간직하였으니 아무도 이를 막을 이 없다.
누가 이것을 고르게 베풀어서 우주를 하나로 만들 것인가.


달마達磨
이 몸은 공허한 것, 하늘과 물이 한 가지 빛이로다.
아득히 지나가는 것은 맑은 바람에 밝은 달 그 가운데 풀잎 하나
오직 하나 ‘모른다’는 사람이네.


보현普賢
어금니 여섯 개인 큰 코끼리는 큰 들로 걸음을 내딛었네.
부귀스럽구나. 이 훌륭한 모습을 보라.
딱할사 산골 길에는 비로소 나의 수레를 달리는구나.


각운覺雲
무심으로 마음을 삼아, 큰 허공으로 드나들도다.
바람은 벗이 되며 비는 아들이라, 그것도 부지런한 일이구나.
오묘한 그 까닭 알아낸 사람, 선사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공민왕이 구곡을 찬탄하여 내린 글과 그림에 이색이 지은 찬문讚文이다. 왕은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 동자보현 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큰 글씨로 쓴 각운覺雲·귀곡龜谷 모두 네 개의 두루마리를 하사하였는데, 높이와 넓이가 똑같다고 하였다.
타고난 기질이 벌써 보통 사람과 달랐고 도학으로 닦은 공부가 또한 원숙하였다. 그러므로 달마達磨의 마음으로, 보현普賢의 행적을 따랐다. 그의 이름을 생각하여 마음에 아무것도 가지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원리를 삼았고 그의 호號를 생각하여 장육藏六을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의 행적은 자연스러웠고 그의 마음은 담담하였으니 본시, 벌써 물질을 물질로 여기지 아니한 것이다. 그가 오늘에 내리신 것을 받음은 요행이 아니요 당연한 것이다.
   (이색, 「사 귀곡서원화 찬 병서賜龜谷書院畵贊幷序」 중에서)


찬문에서 이색이 묘사한 구곡의 성품이다. 구곡은 공민왕에게 22자 법호인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숭신진승 근수지도 도대선사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崇信眞乘勤修至道大禪師」까지 받았다. 구곡은 네 개의 두루마리를 지니고 이색을 찾아가 찬문을 부탁했다.
“임금께서 주신 것을 화려하게 하려면 문장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니 대저 현세의 사람에게 보이며 후대에 전함에 있어서 이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장차 관료들에게 글을 받으려 하는 것이니 그대가 먼저 하여 달라.”고 하였다. 구곡은 이색과 가까워 일찍이 직지사直指寺를 중건하고자 연화문緣化文을 부탁하기도 했다.
장차 세속을 등질 생각을 해서일까. 훗날 자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함을 생각한다면 이색의 이 기록은 구곡의 수행과 천품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