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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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오계의 인간불교적 의미

성운星雲 스님
대만 불광산사 개산조


(지난호에 이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은 자유이자 존중의 의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음이 담겨 있는 불경들은 우리들에게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 사람에 의지하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생기지만, 법에 의지하면 평등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치 도덕은 부처님의 법으로 통치하기 때문에 원수나 적이 없으며, 보시하고 계를 지니며, 널리 인간과 동물을 사랑하며, 친족을 선량하게 대하며, 국민이 번영하고, 부귀와 즐거움을 풍족하게 누리며, 촌락과 마을이 서로 가까이 모여 살며, 서로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며, 갖가지 재주로 놀이를 즐기는 태평성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정치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지만, 본 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이상적이며 지속성을 지닌다. 불교는 본래 교화의 기능이 있다. 예컨대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에 활동했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선생은 “불교의 인과관은 지식인이나 어리석은 백성 모두 믿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저마다 정확한 인과 관념을 수립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서로 속이고 속이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갈취하는 세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저마다 불교의 자비정신을 간직하고 오계를 받아지닌다면 이 사회는 잔혹한 살생 풍조가 줄어들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불교의 ‘업력론業力論’을 이해하면 세간의 선악과 좋고 나쁨은 신들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은 업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업력의 논리 또한 자유의 참뜻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종교는 모두 신들의 힘으로 세간을 통치하고, 일반적인 정치는 지도자가 국가를 통치한다. 오로지 불교만이 신들의 힘을 숭상하지도 않고, 임금의 권력을 중시하지도 않는다. 오직 사람이 저마다 가진 자주적 민권民權과 자유를 중시한다.
‘민권’이 있다고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신·구·의로 짓는 업력에는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두 업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간에서 취하는 모든 행동이 자신의 미래와 앞날을 결정짓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자유를 박탈당했다면 그것은 분명 본인이 지은 업이 불러온 결과일 것이고, 반대로 자유를 얻었다면 그것 역시 자신이 행한 행동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업력론은 이미 세간의 자유정신을 최고의 극치까지 끌어올려 놓았다.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지계의 내용과 지계의 의미, 운명을 결정하는 업력의 원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3. 중생의 생권生權은 평등의 주장
인류의 지혜가 아직 깨이지 않아 자연의 신비한 힘을 숭배하던 신권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왕의 절대왕권에 복종하던 군권시대를 거쳐, 민주사회라는 지금의 민권시대까지 발전해오며, 자유를 제창하고 민권을 중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존엄하며 생존권·참정권·평등권·자유권·재산권·문화권 등을 모두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불교는 인류의 지혜와 더불어 발전해온 ‘민권’에서 더 나아가 ‘생권’을 제창하며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생존의 권리가 있으니 함부로 상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을 보살피고, 제도하며, 천하의 중생을 위해 힘쓰는 것 모두가 불자들이 생권을 수호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에서 “알에서 태어난 것, 어미 뱃속에서 태어난 것, 습한데서 생긴 것, 스스로 생긴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는 이 모두를 중생이라 부른다.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굶주린 중생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나 추위에 떠는 중생에게 의복을 베푸는 것뿐만 아니다. 이런 지말적인 구제는 중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중생의 생사, 중생의 번뇌, 중생의 안전, 그리고 중생의 생권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화두’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평등’이라는 원칙을 반드시 기본으로 삼고, 중생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확실히 보호하며, 중생의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 해탈하여 자유로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금강경』에서 “일체의 모든 중생 무리들을 해탈의 열반에 들게 내가 남김없이 교화하여 제도하겠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역시 생권에 대한 불교의 기본 주장이다.


‘생권’이란 일체 중생의 생존권에 대한 수호를 가리킨다. 세간에 사는 생물은 모두 음식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 풀과 꽃, 나무, 산하대지 또한 햇빛, 공기, 수분, 흙이라는 영향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중생 중에는 육식을 하는 중생도 있고, 초식草食을 하는 중생도 있다. 예를 들면 사자와 호랑이, 곰 등은 육식을 하는 중생에 속하고, 소, 양, 말 등은 초식을 하는 중생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육식과 초식의 중간쯤 되는 중생이다.
근래에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채식도 점차 현대인의 생활 속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인도의 철도 식당에서는 채식을 주로 하고, 미국의 어떤 마을은 육식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슈퍼마켓도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종교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도적이고 건강의 관점에서 채식을 제창하고 있다. 모두 생권을 수호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소, 양, 돼지 등의 ‘구제역’ 범람은 생권 중시와 생권 수호의 중요성으로 더욱 부각되고 있다. 중국은 예로부터 자비로움으로 생물을 보호하는 사상이 있었다. 유교에서는 ‘그 산 모습을 보고서는 그들의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 죽는 소리를 듣고서는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하기에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불교는 가엾은 중생을 보호하기 위해 커다란 자비를 심도록 끊임없이 제창해 왔으며, 그 안에서는 채식의 정신과 의미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불교는 인간을 근본으로 삼아 대대로 전해 내려왔지만, 각지의 풍속이 다르므로, 음식에 대한 강압적인 요구를 하진 않았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라면 생권의 수호를 중시할 것이며, 인류가 생태환경의 보호와 지구의 자연보호를 제대로 자각하지 않으면 자연의 반격을 맞게 되고, 인류의 재난은 그 끝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계에는 지지배배 지저귀는 새와 벌레,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와 흐르는 샘물, 울긋불긋한 꽃들, 시리도록 푸른 녹음, 우리의 눈길이 닿는 것 모두가 생동감 넘치는 풍경이고, 어느 것 하나 살아 숨 쉬는 활발한 생명 아닌 것이 없다.
“계곡물 소리는 모두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 빛은 청정법신 아닌 것 없다”라는 게송이 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 이치를 깨우친다면 우주의 삼라만상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생명에서 생겨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 자동차 한 대, 집 한 채 등 생활용품은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사용 수명을 단축시키게 되는데, 이는 살생과 마찬가지이며, 생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대자연의 모래와 돌멩이 하나, 풀과 꽃 한 포기 모두 우주만유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 함부로 해하거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 역시 살생하는 행위이다. 일체의 생명은 자연과 끈끈한 연관성이 있으며, 생명 또한 자연의 일부분이므로 더욱 아끼고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안타깝게도 장구한 세월 동안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여긴 인류는 다른 생명의 존재를 종종 잊어버리고, 한순간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무고한 생명을 마구잡이로 학살해 왔다. 『법구경』에서는 “모든 것은 다 죽음을 무서워하고 몽둥이의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이치를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보아 남을 죽이거나 폭행하지 말라. 항상 대중을 편안하게 하고 조금의 해악도 끼치지 않으면 현세에서도 해침을 받지 않고 다음 생에서도 늘 편안할 것이다” 하였으며, 『금강경』의 삼륜체공三輪體空의 의미 설명에서는 “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과 같은 중생이기에, 나는 인류를 제도할 수 있는 존재이고 중생이란 내가 제도할 대상이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생권의 보호는 곧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며, 이렇게 생권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평등의 참뜻이라 하겠다.
이 밖에도 마구잡이 벌목은 토사를 흘러내리게 하고, 산비탈을 무작정 경작하면 결국 붕괴되고 마니, 이 모든 것은 대자연을 존중할 줄 모르고 생권을 존중할 줄 모르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다. 심지어 전기 충격으로 물고기를 잡거나, 마구잡이로 야생동물을 포획하고, 각종 해산물을 날로 먹으며, 온갖 생명을 잔인하게 죽이는 경우가 있다. 사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그리고 숲에 사는 동물들 모두 인류와 함께 지구에 공존하는 존재이다. 자신이 그들보다 똑똑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살생하거나 멸종시키지 말아야 하며, 산천대지와 숲과 계곡 등은 모두 생명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고 더욱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멋대로 해를 가한다면 어젠가 생태환경은 모두 파괴될 것이다. 붕괴, 홍수, 모래폭풍, 오존층 파괴 등 인류에게 닥칠 고통스런 결과를 생각하면 ‘인과의 업보’가 실로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생권에 대해 불교의 섬자보살.子菩薩은 대지가 고통스러워 할까봐 걸음조차도 조심스럽게 걸었으며, 대지가 오염될까봐 종잇조각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변담산.擔山 스님은 초목에게 상해를 입힐까 걱정해 일생을 도토리와 밤을 주워 먹고 살았다. 물새가 법을 설하고, 남녀 구분이나 악도 등의 번뇌가 없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생태환경의 보호를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처음으로 생권을 주장하고, 환경보호를 중요하게 여기신 분은 부처님이시다. 생권을 수호하자는 부처님의 외침을 지금까지도 세인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 도처에 마구잡이 살생과 어그러진 기운이 가득 차 있다. 이른바 “탈 휘두르는 세상을 알고 싶다면 한밤 도살장의 소리를 들어보라”는 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생명을 존중할 줄 모르고, 생권을 수호할 줄 모르니 우리의 가장 큰 비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