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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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중흥의 초석을 마련하다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폐허가 된 조선불교를 중흥시킨 청허 휴정은 벽송 지엄의 진영(眞影)에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震旦之皮 天竺之骨 진단지피 천축지골
華月夷風 화월이풍
如動生髮 여동생발
昏衢一燭 法海孤舟鳴乎 혼구일촉 법해고주명호
不泯萬.千秋 불민만외천추
조선의 피부에 인도의 뼈    
중국의 달 동이(조선)의 바람이여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머리털이 나는 듯 하네 
어두운 거리의 한 촛불이여
진리의 바다에 한 조각 배였어라.
아~아 스님의 위대한 모습
천년만년 사라지지 않으리.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왕조에서 벽계 정심이나 벽송 지엄과 같은 스님들이 없었다면 조선불교는 그 명맥이 끊어졌을 것이고, 종국에는 우리나라 땅에서 부처님 법은 영영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청허 휴정 역시 선대 스님네들의 험난하고 외로운 길을 ‘어두운 거리의 촛불’과 ‘한 조각 배’로 묘사하였다.
호가 야노.老이고, 법명은 지엄智嚴이다. 벽송은 그가 살고 있던 곳의 이름을 딴 당호堂號이다. 그는 전라북도 부안 출생인데, 어머니 왕씨가 인도스님이 예를 올리고 하룻밤 자고 가는 꿈을 꾸고 1464년(세조 10)스님을 잉태했다고 한다. 골상이 특이하고 수려하였으며, 영웅적인 기질로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칼 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1491년(성종 22) 여진족이 북방을 침입했을 때는 허종許琮을 따라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인연은 따로 있었다. 그는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세상에 대장부로 태어나 마음자리 하나 지키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리며 몸을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세간 사람들이 출세에 눈멀어 명리名利를 탐할 때 그의 마음은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고 있었다. 일생의 안락보다는 영원한 안락을 탐하는 큰 서원을 세운 것이다.
벽송은 28세 되던 해에 마침내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에 들어가 조징祖澄대사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그는 먼저 연희교사衍熙敎師를 찾아 『능엄경楞嚴經』의 깊은 뜻을 묻고, 다음에는 정심선사正心禪師를 찾아 서래西來의 비밀한 뜻을 물었다고 한다. 그가 벽계 정심을 찾아 갔을 때의 일화다.
벽송은 선지식을 찾다가 정심이 황악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정심은 유생들의 눈을 피해 산에서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팔며 겨우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벽송은 스승과 함께 생활하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선사는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겨우 짬을 내어 스승에게 도를 물으면, 대답이 한결 같았다.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내 마음이 무엇인고?’라고 궁구하거라.”
수개월간 벽송은 땔나무를 지고 김천시장에 내다팔면서 ‘내 마음이 무엇인고?를’ 골똘히 참구하며 지냈다. 그러나 길 없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벽송이 스승에게 선지禪旨를 물으면, 스승은 똑같은 답만 늘어놓았다. 마침내 벽송은 스승의 가르침이 무성의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보따리를 싸서 산을 내려가는데, 스승이 쫓아오면서 계속 이름을 불렀다. 벽송은 들은 채도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때 스승이 ‘나를 보고 가게나!’라고 소리치자, 벽송이 고개를 돌렸다. 이때 스승이 말했다.


“옜다, 내 법을 받아라!”


벽송은 스승의 말을 들으며 주먹을 보는 순간, 활연 대오했다고 한다. 불교가 탄압받아 설 자리를 잊은 채 산중에서 이름을 숨긴 채 살아가는 스승이었다. 쉽게 전해 줄 수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오랑캐의 도로 비난받고 있었던 시대의 정법正法은 쉽게 전할 마음이 없었다. 불법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스승 정심은 벽송이 정법을 전해 받아 다음 세대에게 탈 없이 전수할 수 있는 그릇으로 본 것이다.
벽송은 정심에게 법을 받은 후 용문산龍門山·오대산五臺山·백운산白雲山·능가산楞伽山 등에서 수행하였다. 특히 1508년(중종 3) 금강산金剛山 묘길상妙吉祥에서는 『대혜어록大慧語錄』과 『고봉어록高峯語錄』을 보고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狗子無佛性’화두를 참구하여 칠흑 같은 어리석음을 타파했다고 한다. 이른바 보조 지눌 이후 한동안 불교계에 관심을 받았지만, 탄압과 소외로 사라질 번한 공부법을 부활시킨 것이다. 지눌은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 ‘선정(禪定)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일상인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일상인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해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라고 하는 구절에 주목하였다. 지눌은 “나는 거기서 가만히 그 뜻을 깨치게 되어, 저절로 물건과 같은 것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한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편하고 즐거워졌다.”고 하여 어록의 가치를 알아보고 견성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벽송은 역시 『고봉어록』을 읽다가 “자신의 자리를 다른 세계에 던져버린다.”는 뜻인 ‘양재타방(.在他方)’어구에 이르러 이제까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다. 결국 벽송은 성적등지惺寂等持·원돈신해圓頓信解·간화경절看話徑截이라는 지눌의 유풍遺風을 계승했던 것이다.


대혜화상은 6대조사인 혜능慧能의 17대 적손嫡孫이고, 고봉화상은 임제臨濟선사의 18대 적손이다. 아! 스님은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500년 전 종파의 적통을 비밀리에 이은 사람이다. 마치 유가儒家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같은 무리들이 1천년 뒤에 태어나서 공자와 맹자의 학맥을 계승한 경우와 같다. 유가든지 불가든지 도를 전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동사열전』을 찬술한 범해 각안梵海覺岸은 벽송스님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가치를 강조하였다. 벽송은 선禪의 본고장인 중화中華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500년 전 종파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이은 적통을 비밀리에 이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황망하고 비통한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정법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즉 불교가 조선 건국이후 극심한 탄압과 소외의 과정을 겪으면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벽송의 이와 같은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수행방식은 이후 청허 휴정을 비롯한 불교계의 후학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의 10대 법조法祖이신 벽송대사는 벽계 정심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다. 정덕 경진(正德庚辰, 1520) 3월 지리산에 들어와 초암을 짓고 살았다. 후세사람들이 증축을 해서 큰 절로 만들었기 때문에 ‘벽송사’라고 하였다. 함양군에 속해 있다. 벽송대사가 혜안慧眼이 있어 여러 땅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 도를 닦기에 도움이 되고 이름을 알릴 자리로는 이보다 나은 곳이 없다고 하여 도량을 차렸다. 전후로 마음을 깨우친 사람이 7명이나 나왔다.


벽송은 1520년(중종 15) 지리산으로 들어가 초막을 짓고 정진했다. 오늘날 함양 벽송사碧松寺다. 이후 그의 성품과 도량은 더욱 넓어지고 풍채와 지혜는 더욱 밝아졌다고 한다. 입산入山이후 벽송은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외부와 교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 아첨하지 않고, 불법佛法을 세상에 팔지 않는다고 하여 동시대 수행자들로부터 거만하다고 비방을 받을 정도였다.
1534년 겨울, 벽송은 지리산 수국암으로 옮겨가 『법화경』을 강설하다가 「방편품」에 이르러 “이 노승은 여러분을 위해 적멸상寂滅相을 보이고 가리니, 여러분은 밖에서 찾지 말고 더욱 정진에만 힘쓰라”고 당부한 뒤에 열반에 들었다.
법납 42세, 세납 70세에 입적한 것이다. 입적한 뒤에도 얼굴빛이 변함이 없고, 팔다리는 마치 산사람처럼 부드러웠다고 한다. 청허 휴정과 사명 유정과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 이전에 벽송 지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