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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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중흥의 초석을 마련하다③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경성 일선은 조선불교 중흥조인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의 사숙師叔이다. 그는 1488년(성종 19) 12월 13일 경상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는 조선이 주자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표방한 이래 법전法典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법과 풍속을 성리학에 기초하여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불교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출가가 엄격히 제한되고 탄압으로 환속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경성 역시 동시대의 벽계 정심·벽송 지엄·부용 영관과 같이 평생 자취를 숨긴 채 정법正法을 이어간 것이다. 안과 밖의 사정에 연연하지 않고 법등法燈이 꺼지지 않고 이어간 것이다.
경성은 나이 13세에 단석산斷石山으로 들어가 해산海山법사의 제자가 되었고 16세에 출가하였다. 어려서 양친을 다 여의고 세상이 덧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일찍이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기도 하였고, 혹은 돌을 포개 자리를 만들어 앉기도 했던 것을 보면 이미 깊은 불연佛緣이 있었던 것이다.
경성은 이후 24세 때에는 묘향산 문수암으로 가서 발우 하나와 누더기 옷 한 벌만으로 오로지 고행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죽을 때까지 실천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얼마 후 지리산 벽송암으로 들어가 벽송 지엄을 찾았다. 당시 벽송은 벽계 정심의 법을 이은 후 지리산에서 불법을 천양하고 세간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수행 정진하고 있었다.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달은 밝으며
구름은 가득 끼고 물은 잔잔하구나
저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하면
모쪼록 조사의 관문을 참예하라.


경성을 처음 본 벽송이 큰 그릇이라 여겨 지어준 게송이다. 조사의 관문을 뚫어 ‘저간에 벌어지는 일, 즉 부처의 골수를 훔쳐 달이 밝고 물이 잔잔한 도리를 알라고 당부한 것이다. 당시 경성은 지엄으로부터 부용 영관 등 육칠십의 무리들에게 『법화경』과 같은 대승경론을 배웠다고 한다. 벽송의 가르침을 받은 경성은 화두에 마음을 머물러두고 즐기면서 근심을 잊었다. 마침내 금강산 시왕동十王洞에서 수행할 때는 가슴에 응어리를 풀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조주의 칼날 드러나니
차가운 서리에 빛이 번쩍이는구나.
헤아려 어떠하냐고 묻거든
몸뚱이 두 동강 내리라. 할!
꿈속에서 꿈을 설함이라.
빠뜨리는 것이 적지 않도다.


이후 경성은 입으로 읊고 마음에 참구하는 것이 경절문俓截門이었다. 경절문은 수행 시 단계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본래면목을 터득하여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법문을 가리키는 것이다. 얼마 뒤에는 표훈사表訓寺에 들어가 한 철(一夏)을 보냈고, 천마산天磨山, 오대산五臺山, 백운산白雲山, 능가산楞伽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남은 공부를 완성시켜 나갔다.
불교를 억압했던 정책을 펼쳤던 중종 임금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1536년(중종 31) 범상치 않은 경성의 풍모에 반한 관리가 붙잡아 한 달 반 동안이나 법회와 설법을 펼쳤다. 경성京城의 사대부나 백성들이 경성의 설법을 듣고는 다투어 시주를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 급기야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져 나갔다. 나라에서 불교를 금하고, 스님이 도성을 출입하는 것조차 금지했던 시절이다. 사람들이 대규모로 운집한 불교행사는 역모逆謀로 간주되었던 시기였다. 감찰기관이었던 대간臺諫의 관리들이 세상을 현혹한다고 논죄論罪하여 경성을 의금부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태연한 모습으로 말이 정직하고 이치에 통하는 식견은 의금부 관리조차도 받아들여 방면하였다.
한차례 곤욕을 치른 경성은 곧바로 묘향산으로 갔고, 1544년(중종 39)에는 보현사普賢寺 관음전에 머물렀다. 당시 경성의 공부는 매실이 익을 대로 익어 그 향기가 코끝을 찌를 정도로 무르익은 것처럼 완성의 경지에 있었다. 팔도의 고승과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경성을 보기를 청했다. 경성의 행장을 적은 청허는 이를 ‘해동海東의 절상회折床會’라고 하였다. ‘절상회’는 중국 당나라 여회(如會, 744~823)선사가 그 덕화德化가 크게 떨쳐 배우려고 모여드는 이가 많아 법당마루가 부러질 정도였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찾아오는 이가 점점 많아지자 특별히 집 한 채를 짓고 당호를 ‘경성당敬聖堂’이라고 붙였다. 기록에 의하면 ‘경성당’은 난간·창문·방문 등이 웅장하게 층을 이루었고, 옥빛과 금빛이 찬란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경성은 그곳에서 향을 사르고 임금의 만수무강을 날마다 기원하였다고 한다. 왕과 신료들이 불교를 탄압하고 스님들을 핍박하였지만, 경성은 악惡을 선善으로 갚고자 하였고, 그것을 수행자의 본분으로 여겼다.
대저 배우는 자가 활구活句로 답하지 않고, 헛되이 똑똑함과 영리함으로 말하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천박한 학문을 세상에 뽐내고 자랑한다면, 그들은 참다운 경지를 밟지 못할 것이다.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고 관서關西와 호남湖南을 다니며 산수를 토론하여 헛되이 밥만 축내며, 경론에 빠져서 일생을 속아서 보내며 끝내 생사의 허랑虛浪함을 면하지 못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성품이 되어, 스승의 궤범을 구하지 않고 여우 굴속에 헛되이 앉아 조는 것이 마치 보배로운 산에 다다랐지만 빈손으로 오가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불쌍한 노릇이다.”
경성이 제자들을 가르친 대목으로 당시 불교계의 풍조를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수행의 근본인 활구活句를 배우고 답하지 않고, 어설픈 사량思量으로 정법正法을 왈가왈부한다면 참다운 경지를 밟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질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풍광을 말하고 헛되이 밥만 축내며, 경론에 빠져서 일생을 속아서 보내면 끝내 생사의 허랑虛浪함을 면하지 못한다고 경책하였다.
요컨대 경성은 “너희들 자신의 신령한 빛은 천지를 덮으니, 문자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본체가 그 진상을 드러낸다. 밤에 노끈이 움직이지 않는데 너희들은 의심하여 뱀으로 여기고, 어두운 밤은 본래 비었는데 너희들은 두려워 귀신이라고 생각하여 마음에 진망眞妄의 생각을 일으키고, 성품 가운데 범부와 성인의 분별을 일으킨다. 청하건대 지혜의 부리를 잡고 무명의 껍질을 쪼아 깨뜨린다면 매우 다행한 일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스승의 당부인 것이다.
1568년(선조 1) 2월 30일, 경성은 회암사 주지 무변茂卞, 보현사 주지 원규元珪, 선덕禪德 휘정暉晶, 학현學玄, 선등禪燈 의정義淨, 일정一精 등의 제자들에게 일렀다. “세계는 이루어지고 머물고 무너지고 없어지며, 생각은 생겨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며, 몸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무릇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 사물의 법칙이다. 오늘 노승이 무상을 보이고자 하니 여러분들은 모름지기 바른 생각을 지니고 뒤돌아보며 연민을 품지 말며, 또한 속세를 따르지도 말라.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이는 것은 이익 되는 일이 아니니라. 옛날에 장자는 천지를 관곽棺槨으로 삼았다고 하니 참으로 이치가 있도다. 장자가 오히려 그러하였거늘 하물며 도인道人임에랴. 나는 항상 불가사의한 고개에서 불사佛事를 짓고자 하였으니, 모름지기 내 시신을 드러내 새와 짐승들에게 먹이가 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붓을 들고 크게 썼다. 열반송이다.


팔십여 년의 목숨이여
빠르기가 마치 번갯불과 같구나.
떠나려고 홀연히 눈을 들어보니
활로活路가 고향이라네.


나이 팔십 여년이 허공 꽃 같구나.
지난 일들 아득하여 또한 눈앞의 꽃이네.
문지방도 넘지 않는데 본국으로 돌아오니
옛 동산에 복숭아꽃 오얏꽃 벌써 피었네.


붓을 놓은 경성은 단정히 앉아 조용히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