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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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돋는 자리에서 생명의 아도향을 만나다

이서연
시인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영롱한 순수의 빛이 돋는 마법 같은 신록의 계절이지 않은가.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 지나갈 그야말로 눈부신 신록이 내 영혼의 결을 어루만지는 신비의 순간 아닌가. 마치 첫 경험처럼 파르르 떨리는 순간, 마음자리에 신록을 들여놓으니 그 속삭임이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다. 마술을 부려서라도 꼭 붙들고 싶은 순간이다. 바람도 연록이 되는 계절, 바로 산이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시기다. 여린 잎이 반짝이며 피어날 때 산은 새로 맞춘 옷을 입는 듯하다. 신록 자체가 꽃처럼 피는 이 계절에 잠시 머무는 동안엔 누가 부여하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갖고 싶다. 이것도 집착이라 버려야 한다면 산신께 엎드려 이만큼의 욕망만큼은 심장의 수명이 조금 짧아진다 해도 누리고 싶다고 자비를 빌고 싶다.
경북 구미 태조산 솔숲도 신록의 향기가 한창이다. 마치 꽃처럼 번져가는 신록의 새 기운을 하늘로 전하고 오월 하늘의 기운을 전해주는 듯 우듬지의 끝에서 쏟아지는 바람이 그 어느 때보다 신선하다. 우듬지는 햇볕의 방향, 햇살의 움직임에 민감하다. 생명의 최전선에서 삶의 확장을 책임지고 있다. 투정 없이 척박한 시대에 생명력을 뿜어내기에 숲은 존재 자체가 마음도량이다.
도리사桃李寺, ‘복숭아꽃 오얏꽃 도량’이라… “당신은 아름답습니다”와 “신성함”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고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나 부귀와 다복을 의미하는 모란은 부처님 좌대나 사찰 문창살, 탑에 사용할 만큼 불교문화에 친숙한 꽃이지만 복숭아꽃 오얏(자두)꽃이 불교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과문한 탓에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신라 말의 도선국사가 “5백년 후에 오얏성씨, 즉 이李씨 성을 가진 왕조가 들어서리라.” 예언하였는데, 고려 왕조가 이를 두려워해서 한양의 오얏나무를 베어 왕기를 다스리려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조선이 들어서 오얏꽃이 조선 왕실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으로 오얏꽃이 쓰였음은 경운궁(현재 덕수궁) 석조전 건물에 새겨진 문양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외에는 과문한 탓에 연관성을 모른다. 수십 년 불교공부하면서 글을 썼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아무튼 도리사는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왔다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창건한 신라 최초의 가람. 그 이름만으로도 화사한 미소가 번지는 건 마치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 부처님 법을 수계한 가섭처럼 아도화상의 심법心法이 내 가슴으로 스며들기 때문인가 싶다.
 
어느 날 보내신 편지였나요
오얏꽃 피는 날 오라고


지금 향기로 보내시는 법문편지는
그날 전하시려던 마음이셨나요


- 「오얏꽃 피는 날 아도의 마음편지를 받다」 중에서 -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바이러스로 인해 산문이 닫힌 곳이 많다.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를 연기할 만큼 불교계도 맑은 법향을 전할 수 있을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연등에 불 밝히고 그렇지 않아도 고요한 산사들이 더 적요하다. 그래서 그런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게 두툼한 마스크를 한 채 그 어느 때보다 발뒤꿈치도 닿지 않는 걸음으로 조용히 올라간 적멸보궁에서 울리는 스님의 염불소리가 태조산 숲 갈피갈피에 더 깊이 퍼지는 듯하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에 휘청대는 동안 사람과 사람들은 인식하지 않는 사이 저절로 멀어지는 관계에 순응되어 가고 있다. 마음만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대로 서로 무의미한 관계에 젖어 각자의 방식대로 진화되는 건 아닐까 은근히 염려하며, 새잎이 퍼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고요한 도량 곳곳에 핀 복숭아꽃 오얏꽃들을 따라 적멸보궁에서 내려와 아도화상께 참배하고, 근래의 선지식들이 수행했다는 태조선원과 삼성각 앞 세존사리탑을 돌고,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인 팔작지붕의 고풍스런 분위기가 잘 보존된 극락전, 그리고 고려 시대의 투박하면서도 단정한 손결이 담긴 화엄석탑을 둘러보았다. 시절인연이 닿는 자리에 불연佛緣의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법, 아낌없는 사랑이 쏟아질 때 자비도량이 세워지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자리 ‘아도화상 좌선대’에서 잠시 연둣빛 바람에 젖어 보았다. 모례장자의 손 큰 시주로 부처님의 도량이 이루어지던 시절에도 이 연둣빛 바람은 신라에 불향佛香을 전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도리사의 또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고 있는 곳은 더치커피가 유명한 ‘카페 도리’다. 자원봉사자들의 자비행으로 운영되면서 수익금이 금오복지관과 국제구호단체 더 프라미스로 기부되고 있다. 지금은 잠시 정적인 공간이지만 도리사에 연등불 밝히는 날 보시행의 발길이 더 많은 생명을 살리게 될 것이란 믿음과 희망이 있다.
그냥 지나치지 않게 인연의 마음 한 뼘 주시고자 주지 묘봉 스님께서 손수 우리신 매화차를 마셨다.


매화차 한 모금에 마음자리 복판으로
꽃잎 피는 소리가 들린다
나를 깨우는 님의 목소리로 오는
꽃, 보이는 게 다 봄은 아니라고 한다
새잎 터지는 순간마다 연둣빛에 온몸을 맡기는
산, 이 순간이 영원한 건 아니라 한다
잠시 숨을 멈추고 한 모금 더 마셔본다
함께 한 귀한 인연의 마음결만큼이나
법향으로 피우는 꽃자리에 사랑이 퍼지면
모양만 다를 뿐 생명은 반야의 꽃으로 피는 것
지금 이 자리가 이대로 소중한 이유다
- 「담향산창에서 매화차를 마시고」 -


그리고 주지 스님께서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할 것이라며 생명을 살리는 향이라 알려진 ‘아도향’을 주셨다. 『삼국유사』 「아도기라편」에 “만일 향을 태우면서 정성이 신성한 곳에까지 이르도록 간곡히 축원하면 영험이 있을 것”이라 했다. 맑고 향기로운 산속에 있는 집의 창문(담향산창淡香山窓)에서 생명의 향을 받으니 향을 피워 성국 공주의 병을 낫게 한 아도화상께 편지를 남기고 싶었다. ‘카페 도리’ 입구에 일 년 후에 배달되는 느린 우체통이 있다. 마음이 통하면 그 찰나에 전달될 수 있지만 통하지 아니하면 우체통에 보내도 받을 수 없는 아도화상 앞에 편지를 남겼다. 


서라벌 세운 기둥 그 법음法音 찬란하여
복숭아꽃 오얏꽃은 꽃비사리 뿌립니다
아도여, 이 거룩함을 내 안으로 맞나이다


화상和尙의 미소 속에 이 도량 여여하고
송림松林은 축원으로 푸르름 더해가나
산밑은 시끄럽습니다 노래 다시 토하소서   
              
- 「아도여, 다시 노래하소서」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