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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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월산 기림사 카페 ‘기다림’에서

 


이서연
시인


푸른 속살을 헤집고 나오는 밤꽃향이 고요를 흔든다. 한낮에 달빛을 토해내는 낮달맞이꽃들이 밤꽃향에 흔들리는 가슴들을 향해 웃는다. 마치 봄을 넘어온 신록이 여름으로 들어설 때 잠시 몸살을 앓을 수 있다는 듯하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일 수 있듯이 살짝 흔들려도 그럭저럭 넘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 흔들림이 때론 새로운 설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 설렘이 애틋함으로 전환될 때 사랑은 숙성되어 향그런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설렘에 잠 못 들었다면 그건 행운이다. 정들은 외로움에 젖어 잠들었다면 그 또한 행운이다.’라고 속삭이는 듯 함월산은 여름밤 잠을 설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푸른 바람을 내어 준다.
바이러스로 무너지고 있는 일상에 인간은 그저 나약한 존재다. 그 절망에서 한줄기 빛을 붙들고 싶어 자연을 찾는 이에게 자연은 푸른 기운을 섞은 꽃향으로 위안을 준다. 밤꽃에는 항균성분이 있고 불안감, 우울감 등의 감정을 완화시켜 준다고 알려졌다. 밤꽃 향기 그윽한 숲길을 걷는 것도 심신에 유익한 아로마테라피(향기요법)라 하겠다.
옛날 서천국(인도) 사라수왕과 원앙부인 사이에 태어나 수행자가 된 안락국 태자는 스승 광유가 해동의 남쪽 지방에 명당자리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창건하고 중생을 교화·제도하라는 말씀대로 계림국에 도착해 임정사라는 절을 창건했다. 이 절을 643년 원효대사가 신라 최초의 절이라는 의미로 부처님 당시의 최초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 ‘기림사祇林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기림사 옆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셨고, 아들 설총이 유해를 분황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기림사에서 골굴사(혈사), 분황사, 원정교까지를 오늘날 원효대사의 구도의 길로 여기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 보인다.
경주에서 감포 바닷가로 향하는 옛 국도에 추령재가 있고, 그곳에서 기림사로 들어가는 길이 신라 신문왕이 마차를 타고 삼국을 통일한 아버지 문무왕의 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보다 앞서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간 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나라를 구원할 힘을 얻은 길이라 하여 현재는 신문왕 호국행차길, ‘왕의 길’이라 불리고 있다. 이름에 비하면 자연의 미를 그대로 간직한 채 소박한 분위기다. 깊은 계곡의 물소리와 맑은 새소리만 들리는 길을 호젓하게 걷다 보면 용연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설렘을 안고 온 가슴을 녹여준다.
용연폭포에서 기림사 도량으로 은은한 밤꽃향을 따라가는 동안 간밤에 내린 비로 생긴 웅덩이에는 쌍쌍의 개구리들이 축제 중이었다. 신문왕의 왕비가 기림사 도량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었다는 기록에 따라 현재 기림사는 향기롭고 기품 있는 도량으로 변신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나라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왕을 기다리며 도량을 가꾸던 왕후마마가 가슴으로 피우고 뿜어내는 꽃향기에 어떤 기원이 깃들어 있었을까….
왕이 곧 나라였고, 왕의 근심이 곧 나라의 근심이었기에 간절하게 기도하며 왕이 편안한 마음으로 품에 들어올 날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도량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부처가 되려는 중생을 부처처럼 모시고자 하는 서원의 도량으로 거듭나는 듯하다.  
 
뿜어내는 달기운을 품은 산에
고요한 왕의 길을 바람 따라 밟아본다
계곡에 초록이 퍼져 꽃향마저 푸른 날
 왕후는 기도하듯 설렘으로 꽃을 심고
물 한 모금 갈증 풀 듯 속내를 풀었을까
녹음에 절여진 도량엔 바람조차 묵언중 
                -「푸른 날 기림사에서」 전문-


기림사는 무엇보다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건축물에서 깊은 기품을 느낄 수 있음이 좋다. 천왕문부터 천천히 도량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옛 향기를 잘 간직한 각 전각들을 돌면 주련의 뜻을 풀어놓은 목판들이 있다. 오래 전부터 부처님은 나를 위해 법문을 준비하셨구나 싶다. 또한 기림사 대적광전 꽃살문은 화장하지 않아도 고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나이듦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한다.
조심스럽게 솟을금강저꽃살문과 솟을매화꽃살문의 아름다움을 살피며 법당에 들어서면 삼신여래의 그윽한 미소가 그간의 시름을 다 내려놓게 한다. 약사전의 약사여래의 품위 있는 미소도 놓쳐서는 안 되는 법향이다. 석조오백나한상을 모신 영산전, 그리고 영산전 앞의 삼층석탑, 맞은편에 목탑지, 대적광전 남쪽으로 무량수전과 진남루는 기림사 역사의 향기를 그대로 품고 있는 보물들이다.
만약 누구라도 멋진 나무들과 꽃들 사이에서 법향의 보물들을 발견하고 만나는 즐거움을 깨닫는다면 사찰을 순례하는 동안 저절로 법열의 환희심을 얻게 될 것이라 본다.
대적광전, 약사전, 영산전 그리고 진남루가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 중앙에는 우리나라에서 꼽히는 아름다움을 지닌 반송이 자리하고 있다. 멋진 반송을 한 바퀴 돌며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도량의 아름다움 절반을 본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진남루는 기림사가 호국사찰의 역할을 했던 도량임을 느끼게 한다.
이제 도량을 돌았으니 물 한 모금을 마셔야 할 것이다. 기림사는 우리나라 차 유적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사찰이다.
다섯 가지 독특한 맛을 내는 물이 있기로 유명하다. 삼층석탑 옆에는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서 장군이 난다는 ‘장군수’가 있고, 천왕문 안쪽에 물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았다는 ‘오탁수’가 있으며, 천왕문 밖에는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 그리고 후원에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 진다는 ‘화정수’와 북암에 하늘에서 내리는 단이슬이라는 ‘감로수’가 있다.
‘장군수’는 왜인들이 이순신 장군과 같은 뛰어난 장군이 더 이상 조선에서 나오지 않게 하려고 없앴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도량 곳곳에 마련된 돌허벅의 물은 각각 맛이 다르므로 목마를 때만이 아니라 마음이 마를 때마다 감로수로 여기고 마심이 좋을 것 같다.
기림사의 찻집이라는 뜻의 ‘기다림祇茶林’은 이런 감로수로 차를 우려 준다. 찻집 전체가 예쁜 미술관이다. 차 유적지 찻집답게 메뉴가 범상치 않다.
<신라말차 용연龍淵>은 녹차 말차다. ‘카테진’성분의 항산화작용으로 암세포의 증식과 전이를 억제해 주는 효능이 있고, 피부노화 억제와 중금속 배출에 좋은 작용을 하는 차로 알려져 있다. 2천 년 신라차의 역사를 조명하여 만들었다는 차가 이곳에서 제공되고 있다. 또한 뽕잎 말차 <삼우목三又木>도 범상치 않다. 혈당조절물질이 다량으로 함유된 뽕잎차라 『본초강목』에 당뇨 풍, 종기, 동창에 효과가 있고, 몸이 붓는 증세와 손발이 저리고 감각이 없는 것을 다스린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여성들이 많이 찾는 쑥잎 말차 <봉래초蓬萊草>도 있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해 『동의보감』에 위장과 간장, 신장 기능을 강화해 복통 치료에 좋고, 하복부의 습을 제거한다고 한다. 면역력에 좋다하여 요즘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보리순 말차 <강남안江南岸>도 있다. 체질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마실 수 있어서 가족이 왔을 때 많이 즐기는 차라고 한다.
넓은 창으로 보이는 경치를 가슴에 담으며 녹차를 마시다 천장의 늠름한 수탉과 눈이 마주쳤다. 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푸른 날이 아니어도 좋은 인연과의 설렘을 기다린다면 아니, 느끼고 싶다면 이 도량에서 차 한 잔을 마시라 권하고 싶다.
베란다 쪽에는 아름다운 글귀가 걸려 있다. ‘조금 일찍 왔다면 작약도 목단도 봤겠다 싶고 조금 늦게 왔다면 연꽃도 능소화도 봤겠다 싶다’는 글은 지금의 내 상황과 같은 이가 쓴 글이구나 싶다.


‘바람 없어 잠시 쉬고 있는 저 풍경처럼/ 바람 있어 코끝에 스치는 이 꽃향기처럼’이라는 글귀를 읽다가 나도 몇 자 적어 본다.


신라차향을 따르니 인연이 곱다
고운 인연을 따르니 차향이 더욱 향그롭다
-기다림에서 ‘용연龍淵’을 마시다-


산중다실山中茶室 ‘기다림’은 아트 갤러리와 카페로 수익금이 경주시 장애인 종합복지관 장애인들을 위해 쓰여진다고 한다.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가 곧 보살심이다. 그러니 어찌 차 한 잔 마시는 보시에 좋은 인연이 따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