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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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因緣)을 귀하게 여겨라













   정우(頂宇)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맑고 깨끗함이 어둡고 침침한 허공과 만나서 부딪치고 요동치고 흔들리다가 거기에서 바람기운이 생기고 바람의 마찰력에 의해서 불기운이 생겼으며 불에 탄 것은 물이 되었고 굳은 것은 흙이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화엄경(華嚴經)≫에서는「흙은 물의 기운이 함께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물은 불기운이 함께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으며 불은 바람기운이 함께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바람은 흙의 기운이 함께하지 않으면 존재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사대육신은 따로따로 나누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흙에는 물기운과 불기운, 바람기운이 함께하고, 물에는 또한 흙기운과 물기운, 바람기운이 함께하며 불에는 흙기운과 물기운, 바람기운이 함께하고, 바람에는 물기운과 불기운, 흙기운이 함께 할 때라야 만이 온전한 지수화풍으로 머무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노병사도 결국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물기운이 흩어지고 있는 모습이고, 병들었다는 것은 불기운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며,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바람기운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항상 바뀌어간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기다림도 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은 바람과 같고 머무르지 않는 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는 「우리 중생의 마음은 바람과 같다. 멀리 떠남으로 잡을 수 없으며 그 모습을 볼 수도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 머무르는 일 없이 일어났다가는 곧 사라져버리는, 그러나 파도와 물이 다르지 않듯 물과 거품이 다르지 않듯 우리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기체험이 없으면, 마치 눈먼 장님이 등불을 들어서 남을 밝혀 주지만, 자기 스스로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 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나치게 인색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결국 욕심이 많거나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등지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가운데 ‘원망하지 말라’고 한 것 또한 이러한 이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던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쉼이 없나니, 내가 쉬어야 원망은 사라진다.」는 법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사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윤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고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에 영향을 받는 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복 있는 이가 장애가 없는 것처럼, 지혜가 없으면 복을 짓지 못하는 것처럼,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장애가 생기고 곤란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계에서는 오해와 혼돈의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생야일편 부운기(生也一片 浮雲起)요 사야일편 부운멸(死也一片 浮雲滅)이며 부운자체 본무실(浮雲自體 本無實)이요 생사거래 역여연(生死去來 亦如然)」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생이라는 것은 한쪽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한쪽 구름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것과 같음이요, 구름이라는 것은 실다움이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이 육신을 근간으로 해서 생각하고 있는 나도 또한 오고감이 그와 같은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게 되면 나라는 실체도 기실은 그림자와 같아서 업연에 따라서 오고가고 할 뿐, 본래 청정무구한 내 본체는 오고감이 없이 다만 모양이 다르게 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간간히 사진을 찍어 놓았을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찍어놓은 사진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그 사진 중에 어떤 것이 참 나일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몇 살 때, 어떤 모습일 때가 나를 나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내 모습을 은사스님이 걱정했을 정도로 좋아 했는데, 지금도 그 마음이 변치 않아 아이들만 보면 예뻐 보이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절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내가 아이를 예뻐해주면 󰡐할아버지 스님께 합장인사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할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면 󰡐내가 벌써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되었는가?󰡑 하는 서운한 마음이 생기면서도 문득, 모르고 있는 사이에 나도 지구 돌아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늙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매 순간순간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 말씀은 통도사 창건주이신 자장율사의 법문이기도 합니다.

자장율사께서 통도사에서 수행하고 계실 당시 신라의 선덕여왕이 율사의 인품을 흠모하여 왕실에 와서 조정일을 맡아줄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율사께서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한사코 거절을 하자 선덕여왕은 마지막으로 다시 사신을 보내면서 󰡐시원찮게 답변을 하면 알아서 처리해라󰡑고 하면서 장수를 함께 딸려 보냈습니다. 그 때 율사께서 하신 말씀이 ‘하루를 살지라도 출가자답게 살다가 가지, 출가자 모습을 잃어버리고 100년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선덕여왕이 크게 깨닫고 손수 가사를 지어 말을 거꾸로 타고 통도사를 찾아와 율사께 직접 지은 가사를 바쳤습니다. 그 가사가 현재까지도 통도사에서 보물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 자장율사 친착가사입니다.

자장율사의 이 가르침은 그림자만 좇는 허상 속에서 머물러있지 말고, 나답게 모두가 이해되고 납득할 수 있는 나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라는 법문입니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서도 「이 몸이 물거품같고 불꽃같고, 파초줄기 같고, 꿈같고, 산울림같고, 뜬구름같고, 번개불같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우리 몸은 무상하기 때문에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거나,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줄 알다가 상처받지 말고, 살아있을 때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은 늘 이 마음자리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 그 자체는 결국 삶의 현상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이가 결국 내일도 오늘이 되었을 때 열심히 살 것이고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이는 이미 어제도 열심히 살아온 사람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힘들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괴로움이라는 고통, 슬픔이라고 하는 아픔, 이런 것들을 말을 바꿔서 말하면 혼란과 착각을 가져오는 두 축이라는 것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는 이 말은 바꿔서 말하면 화를 잘 내는 사람, 신경질을 잘 부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렇듯이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말을 바꿔 말하면 사물을 정상적으로 비춰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착각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마음을 어떻게 치유해야하겠습니까?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치유해야만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진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생활 속에서 우리들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은 그 무엇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지 않는 삶의 현상에서 드러나는 덕목입니다. 그것은 수행과 정진을 통해 나타나는 지혜입니다.
밥상머리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은 기본입니다. 서서 밥을 먹는 것 보다, 돌아다니면서 밥 먹는 것보다 밥상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이요,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앉아 있으면 밥이 저절로 먹어집니까? 거기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배가 불러집니까? 거기에 앉으면 밥 먹기가 편리할 뿐입니다. 즉, 행위는 내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선수행도 마찬가지이고, 염불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져있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가 내 스스로 했을 때, 그 자리가 진정한 수행이고 진정한 정진의 자리입니다.

그러한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나를 스스로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다보면, 함께 살아가는 이들도 이에 동화되어 변화되게 마련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나만 좋아해서는 안 되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엄격한 사람이, 나에게 자애로운 사람이 모든 일에도 함께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계속 이어져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인생은 단 한번 뿐입니다. 그러할진대, 세상을 살면서 하심 못할 일이 뭐있고, 겸손하게 살지 못할 일이 뭐 있고,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살지 못할 일이 뭐 있습니까? 또 진정으로 상대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왜 진심으로 그런 것을 요청할 수 없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기도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인데, 하물며 부모형제 처자권속으로 맺어진 숱한 인연들 속에서 성숙된 삶을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되어 주었고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그늘이 되어 줬던 분들이 우리들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직간접적으로 내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을 주었던 분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각자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항상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들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그러한 그런 자양분이 되어 주고 울타리가 되어주고 그늘이 되어주고 윤활유가 되어주고 비타민이 되어줄 수 있는 삶, 그러한 삶이 보살의 바라밀을 행하는 생활불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