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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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의 사회적 실천

박 경 준

 깨달음의 완성과 정토 건설은 불교의 양대 목표다. 불국정토 건설을 향한 '불교의 사회화'는 현대불교의 화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인간불교'가 대세이고 구미에서는 '참여불교'가 주류다. 이제 불교인의 사회적 실천은 거부할 수 없는 정언명령이 되었다. 이번 달에는 대승열반경의 가르침을 통해 불교인의 생활 속에서 사회적 실천이 왜 필요한지 살펴보도록 한다.

불교의 인과응보 법칙은 종종 현실에 들어맞지 않을 때가 있다. 착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못사는 반면, 빈둥빈둥 놀면서 나쁜 짓만 하는 사람은 잘 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삼세윤회설로 해결할 수가 있다. 즉 착하게 사는 사람이 못사는 것은 전생의 악업 때문이거나 혹은 내생에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요, 나쁜 짓 하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은 전생의 선업 때문이거나 혹은 내생에 나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자 혹은 남자로 태어나거나,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는 등, 여러 차별적인 현상도 그것이 과거생의 개인적인 업인(業因)으로 인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별 문제가 없어진다. 그러나 도덕적 인과 법칙인 삼세윤회설로써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현상이 과연 선악의 행동과 필연적인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우연히 벼락에 맞아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과거나 현재의 악업 때문에 그런 변을 당한 것일까?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돌담이 무너지는 바람에 돌에 깔려 죽었다면 그것도 그 사람의 나쁜 행위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 버스나 비행기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죽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전생에 똑 같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과보를 함께 받은 것일까. 인도의 하층민, 불가촉천민들의 불행은 그들의 공동의 죄업 때문일까.
이와 같은 문제점을 옛 불교인들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겪는 일들이 도덕적 인과업보가 아닌 또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대승열반경』「교진여품」은 분명하게 설한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사대(四大)와 시절(時節)과 토지(土地)와 인민(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본업(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이 내용 속에는 업설에 대한 발상의 일대 전환이 나타나 있다. 사람들이 불행하거나 행복한 것은 자신들이 과거에 지은 근본적인 업[本業] 때문만이 아니고 또 다른 원인들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 또 다른 주요 원인으로 『열반경』은 위에서 보는 것처럼 사대, 시절, 토지, 인민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인식의 전환이 가져온 의미있는 성찰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제 열반경이 사람들의 행·불행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변수로 제시한 네 가지 사항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는 사대이다. 사대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큰 요소로서 지·수·화·풍을 가리킨다. 땅·물·불·바람은 각각 독자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기후 풍토 등의 자연 환경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진, 홍수, 화재, 태풍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기후 조건에 따라 우리의 삶이 얼마나 크게 달라지는가를 생각해 보자. 열반경은 이러한 자연 현상을 도덕적 인과 법칙의 범주와 구분하고자 한 것이다.

둘째는 시절이다. 통일신라시대 신라인의 삶과 조선시대 조선인의 삶, 그리고 21세기 한국인의 삶을 생각해 보자. 전쟁 시기의 삶과 평화 시기의 삶을 비교해 보자. 시대에 따라 삶의 방식이 우리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인과응보의 진리만을 집착한다면 그것은 결코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는 토지이다. 여기서 토지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지역 또는 국토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곡식을 창출해 내는 토지이다. 한대지방과 열대지방의 차이는 크고, 같은 지역이라도 척박한 땅과 비옥한 땅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척박한 땅에서는 아무리 노력하여 농사를 짓더라도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없는 반면, 비옥한 땅에서는 조금만 노력해도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도덕적 선악의 행위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는 인민이다. 여기서 인민은 단순히 사람들 개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민 집단으로서의 사회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법, 도덕, 관습이며 제도요 체제다. 법과 관습과 제도에 따라 선악의 개념이 달라지기도 한다. 잘못된 법과 제도, 관습과 체제에 의해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러한 변수들에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선행만으로는 안 된다. 공동의 노력[공업]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환경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환경오염의 피해에서 벗어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공업을 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불교의 업설은 원래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바탕한 주체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동시에 그것은 자유에 따르는 책임, 권리에 따르는 의무를 강조하기 위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한 업의 이념이 마침내 사회환경 및 자연환경까지도 공업의 산물이라고 규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인간과 무관해 보이는 자연 현상에 인간이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현상이 공업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자연현상에 다만 순응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연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우리가 자연 현상에 부분적으로 관여하고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자면 벼락에 맞아 죽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데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내버려 두기보다는, 벼락이 떨어지는 원리를 연구하여 그 원리에 바탕한 피뢰침을 개발하여 설치하면 어느 정도 벼락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것과 같다. 앞으로 인공 강우가 현실화되면 가뭄의 피해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공동으로 노력해 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더욱이 사회 환경의 개선에 대해서는 우리가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관심과 능동적인 참여 의식을 가져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어느 날  버스가 교차로에서 트럭과 충돌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하자.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함께 사고를 당해 죽게 된 것은 필시 과거생에 그들이 함께 악업을 행한 과보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담담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열반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할 것이다. 열반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러한 체념적·달관적 태도와는 오히려 반대의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열반경은 시민들이 버스의 안전성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타성적으로 버스를 이용한 승객들 각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접촉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시민들 스스로가 교통행정시스템, 신호체계, 운전기사들의 노동환경, 정비 시스템, 도로 사정 등을 일일이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런 일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 모두가 연대의식을 갖고 함께 실천해야 할 일이다. 시민사회운동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열반경과 공업사상은 결국 우리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입시지옥에서 고통 받는 수험생들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은 수험생 개개인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타이르든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수험생들이 각자 최선을 다하여 공부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대학에 입학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 모든 수험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입시제도와 교육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며,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적 실천의 당위성은 여기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우리는 대개 불교의 인과응보를 조금은 신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승열반경』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과응보가 설해져 있어 이채롭다. 부처님은 고통과 안락의 현실[果報]이 단지 과거의 악업과 선업[業因]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업으로부터도 연유한다는 점을 밝힌다. 부처님은 이것을 다음의 비유를 통해 증명한다.


어떤 사람이 왕을 위하여 원수를 제거하고, 그 인연으로 재물을 많이 받았다면, 이 재물로 인하여 현재의 즐거움을 받나니, 이 사람은 곧 현재에 즐거움의 인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니라. 또 어떤 사람이 왕의 아들을 죽이고 그 인연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이 사람은 현재에 괴로움의 인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니라.


현생의 업의 과보를 현생에 받는다고 하는 가르침은 이미 『중아함경』「사경」에 설해져 있다. 즉 '만일 (현세에)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혹은 현세에 혹은 후세에 받는다고 나는 설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그러나 『열반경』의 가르침 속에는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앞에 인용한 두 비유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업의 과보가 개인적이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서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원수를 제거하여 재물을 받거나 왕자를 죽이고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벌제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세에서 현세로 이어지는 신비적 업설이 아니라 현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구현되는 업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르침은 확실히 업설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있다. 인과응보가 법과 제도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라면, 좋은 과보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 개인적으로 선근공덕을 쌓아야 할 것이고 다음에는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올바른 법과 제도를 확립하고 그것이 정당하게 집행되도록 해야 한다. 바르지 못한 법과 제도는 오히려 인과업보의 질서를 굴절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올바른 법과 제도를 확립한다는 것은 곧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구성원 공동의 실천과 행동은 필연적이다. 불교인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 실천에 동참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각주)-----------------
 이 글은 졸고 「불교공업설의 사회학적 함의」『불교학보 52』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수정한 것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