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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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의 향기

조현 /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나무꾼 선사’ 수월 스님(1855~1928)의 존재를 안 뒤 수월은 늘 내 가슴 한 가운데 보름달처럼 떠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90여 년 전 나라를 잃고 살 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던 동포들을 어루만져주던 간도 일광산에 연이어 두 해째 찾아가게 되었다. 지금은 중국땅 연변 도문시에 있는 일광산 화엄사터는 수월이 낮에는 소를 키우고 밤에는 짚신을 삼고 주먹밥을 해 나라를 잃고 일제의 억압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오는 동포들을 위해 고갯길에 주먹밥을 쌓아놓고 먹이고, 나뭇가지 짚신을 매달아 아픈 발의 고통을 덜어주던 곳이다.

지난해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과 함께 일광산 화엄사터를 거쳐 연길시 신흥법당 개원식에 참여했다. 신흥법당은 수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선족들이 연길시내 중심가에 세운 법당이다. 조계종에서도 화엄사터의 복원을 위해 애썼지만 다른나라가 중국에 종교시설을 세우기는 사실상 어려워 연길시내에 법당을 마련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년 만에 다시 방문해보니 일광산 아래 전형적인 배산임수터에 수월 스님을 기리는 대가람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과 1년 만에 수월을 기리는 사찰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들어서 있었다. 그 사찰은 막바지 공사 중이었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수월로부터 감화를 받은 한 조선족 동포가 의사를 하던 부친이 남긴 유산을 몽땅 털어놓고, 자기 부부들이 한국에 가서 번 돈까지 전 재산을 보시해 대가람을 지었다는 것이다. 중국 국적을 가진 그들이 추진했기에 종교시설 신설이 지극히 어려운 중국에서 새 사찰을 건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누구나 수월이 말년을 보낸 그 허신의 땅에서 ‘수월’의 가람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수월은 근대 선의 영웅 경허선사의 맏상좌(첫제자)이지만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선사였다. 서산 천장암에서 불목하니(절 머슴)로 살다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워 득력한 수월은 가는 곳마다 방광을 했고, 한번 들은 것을 잊지 않은 불념망지와 잠이 오지 앉고, 손으로 만지면 병이 낫는 경지를 이룬 도인이었다. 그는 견성 뒤에도 일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머슴처럼 일만 했으나, 뜻하지 않은 방광으로 정체가 드러나곤 했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조실로 추대하면 그 다음날 아무도 몰래 절을 나와 멀리 가버렸고, 그곳에서 다시 머슴처럼 살아갔다. 그러다 간도까지 가서 동포들을 돌보다 세상을 떴다.

수월은 그처럼 은둔의 삶을 살았지만 수월의 사제로, 경허의 법을 이은 만공선사는 생전에 “수월 사형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면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나타냈고, 수월의 열반에 즈음해 만해 한용운은 자신이 펴낸 잡지에서 “조선의 마지막 대선사이신 수월대선사께서 열반하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수월이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인들 사이에선 대도인으로 추앙받은 존재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월은 간도로 건너가 말년을 보냈기에 남북이 분단되고, 오랫동안 중국과 국교마저 단절돼 있어 그는 ‘잊혀진 전설’로 사라져갔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만공을 시봉했던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지난 3월 열반)과 원담의 상좌인 정혜사 수좌 설정 스님 등이 간도에서 수월의 흔적을 찾아 나섰고, 젊은 시절 지리산의 한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수월의 얘기를 전해 듣고 발심해 훗날 간도 현장을 답사한 뒤 수월에 대한 책을 펴낸 김진태 청주지검장 등을 통해 수월의 면모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 말고도 전남 여천 흥국사 주지 명선 스님이 1990년대 초부터 소리 없이 간도와 흑룡강성을 십여 차례나 누비며 수월의 행적을 더듬어왔다. 그는 수월의 유일한 제자인 묵언 스님의 상좌인 도천 스님(충남 금산 대둔산 태고사 조실)의 상좌다. 수월의 증손상좌인 셈이다.
명선 스님은 “수월 스님은 머리를 기른 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거해 살던 스승 경허 스님을 좇아 북쪽으로 왔다가(1912년부터) 이곳 먼발치서 스승을 지켜오다가 스승이 열반하자 장례를 치른 뒤 옛 고구려 땅인 흑룡강성 나자구 왕청현 송림산에 들어가 3년을 보내다 1928년 열반했다”고 말했다.

그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광산과 송림산에서 수월을 직접 뵈었던 노인들이 있어서 많은 증언을 채록할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흑룡강성 왕청현 태평촌에 살던 방씨노인은 수월 스님의 삶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방씨노인의 전언에 따르면 수월은 매일 아침 공양(식사) 뒤엔 산을 내려와 탁발을 하거나 들판에서 이삭이나 무시레기 등을 주워서 짊어지고 올라갔다. 송림산은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여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굶어죽는 일이 많았다. 수월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레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주어 아사를 면케 했다. 당시 나자구 사람들은 소금을 사기 위해 송림산 300리를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며칠 걸려 다녀오곤 했는데, 수월은 단시간에 그곳을 다녀와 사람들은 수월이 축지법을 쓴다고 생각했다. 또 수월이 손을 대기만 하면 병자들이 나아서 그 고을에선 의사가 필요 없었다.

방씨가 12살 소년이었을 때 수월은 소년의 부모에게 찾아와 “이대로 있으면 호랑이 밥이 되니, 일주일만 내 곁에 두라”고 말했고, 수월을 불보살의 화현으로 여겼던 부모의 명에 따라 수월을 따라 올라가 단칸 흙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 때 보니 수월은 일체 눕지 않았고, 아예 잠을 자지 않았다. 5일째 되는 날 오줌이 마려 방을 나서려는데, 수월이 손목을 잡고 주저앉힌 뒤 밖을 향해 “이놈아, 이제 그만 가거라”라고 말해 밖을 내다보니 눈에 불을 켠 호랑이가 있었다. 수월이 열반에 들자 마을 사람들이 다비하고는 다음날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는데, 하얗게 수북이 쌓인 가을 서리 위로 남쪽을 향한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 수월의 놀라운 삶을 증언해줄 방씨 노인을 비롯한 증언자들을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화엄사터에 수월의 대찰을 복원한 재가거사는 늘 부모로부터 수월 선사의 얘기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또 화엄사터가 있는 도문시의 종교국장은 자신의 어머니가 갑작스런 병으로 손도 못쓰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수월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이번에 수월의 가람을 복원하는데 행정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수월은 갔고,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향기는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



<발문>
‘나무꾼 선사’ 수월 스님(1855~1928)은 근대 선의 영웅 경허선사의 맏상좌(첫제자)이지만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선사였다. 그러나 경허의 법을 이은 만공선사는 생전에 “수월 사형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면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나타냈고, 수월의 열반에 즈음해 만해 한용운은 자신이 펴낸 잡지에서 “조선의 마지막 대선사이신 수월대선사께서 열반하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수월이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인들 사이에선 대도인으로 추앙받은 존재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