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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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럼없는 삶을 살아가는 불자가 되자










   정우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근대한국불교의 대강백(大講伯)이자 선승(禪僧)이신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스님이 육당(六堂) 최남선에게 들려준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습니다.


「늙음을 허무하다 하는 것은
죽음도 삶도 깊이 모르는 입에서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이 번지듯이
햇살이 창에 스며들 듯이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것.
밝게 스며드는 죽음을 알게 되면
늙는 것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네.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롭게 사는 일만
오롯이 남아서 오히려 조용하고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이라.」


이 법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상하다’와 ‘허무하다’는 말의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부터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무상’과 ‘허무’의 뜻을 같은 의미로 이해한 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살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하고 인생에 대한 반조보다는 후회의 마음을 내기가 십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그래서 해야 하고, 그 일을 했는데도 어딘지 허전하고, 허탈하고, 허망하고… 마치 아편쟁이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무상함을 제대로 알아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출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 히말라야의 설산(雪山)에 ‘야명조소(夜鳴鳥巢)’라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밤 야(夜), 울 명(鳴), 새 조(鳥), 집지을 소(巢)의 한자 뜻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밤에만 집을 짓겠다고 우는 새’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히말라야의 설산에 살고 있으니, 밤이면 추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밤만 되면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겁나니까 잠도 못자고 밤새도록 덜덜덜 떨면서 ‘이 밤이 새고 나면 반드시 집을 지을거야.’라고 되뇌이다가 아침에 햇살이 떠오르면 얼었던 몸이 녹으니까 그새 밤에 다짐했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생활하다가 다시 밤이 되면 추위에 떠는 생활을 반복하며 살아간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찌 야명조소 뿐이겠습니까? 새 중에서도 찾아보면, 뻐꾸기는 스스로 집을 짓지 않고 까치나 종달새 등의 둥지에 알을 낳아 가짜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인 뒤 스스로 날 수 있을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둥지를 떠나버립니다. 심지어 자신이 먹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가짜 어미의 진짜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의 삶을 살펴보면 야명조소나 뻐꾸기보다 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중상모략하고 시기질투하고 권모술수 쓰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산 사람들이 늙음을 허무하고, 허전하고, 허탈하고, 허망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늙음을 허무하다 하는 것은 죽음도 삶도 깊이 모르는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즉, 늙음을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음도 삶도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늙는 것은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안 죽을 사람, 안 떠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모든 생명체는 생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노병사는 차치하고라도, 늙기도 전에 가는 이도 있고 사고로 단명한 이도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생로병사이니까, 죽음이라는 것도 생로병사의 한 과정일 뿐인 것입니다. 한지에 먹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밝게 스며드는 죽음을 알게 되면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참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밝게 스며드는 죽음을 알게 되면, 지혜롭게 사는 일만 오롯이 남아서 오히려 조용하고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심(衆生心)으로는 우리들 마음에 본 성품이 지니는 깊이와 또 그 마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인지하지 못하여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본성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막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음의 본성이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모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보기 어려운 것처럼 마음의 본성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의 본성이 너무 심온(深穩)해서 우리를 숨막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심심심(心心心)이 난가심(難可尋)이요, 관시(寬時)에 변법계(偏法界)하고 착야(窄也)에 불용침(不用鍼)’이란 말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담아보기로 하면 우주가 다 들어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크지만, 같은 그 마음을 좁게 쓰기로 하면 바늘 끝 하나도 꼽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작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마음의 본성이 너무 쉬워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은 어느 순간에도 나와 함께 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와 함께 현존하고 있다고 믿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좋은 벗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좋은 벗 중에서도 최고는 부모형제요, 처자권속입니다.

둘째, 화내는 마음을 여의여야 합니다.
욕심 많고 어리석은 사람이 화를 잘 냅니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닦으면 욕심도, 화내는 것도 다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화가 나는데도 웃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화 안내는 사람이 욕심이 적은 사람이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으로서 최고이지만, 화가 날 때 웃는 사람은 화가 났다는 것을 숨겨놓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화가 날 때 화내는 사람이 인간적으로 낫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일입니다.
넷째, 애민섭수(哀愍攝受)하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다섯째,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수행정진(修行精進)을 잘하면 부처님 안 되려고 해도 지혜광명(智慧光明)이 늘어나고, 반야지혜(般若智慧)가 늘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처님같이 자비한 삶을 살 수 있고, 우리도 보살같이 바라밀다(波羅密多)를 행할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전깃불을 밝히면 어둠은 전깃불 밝은 조도만큼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리석음이나 탐욕(貪慾), 성냄,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라는 번뇌(煩惱) 역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드리우면 저절로 소멸되는 것이지 그것을 없애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출가 역시 세상을 버리고 현실의 고통을 피해서 산속 깊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사(生死)가 없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고자하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부러진 날개》의 작가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나날이 거듭납니다.
내 나이 여든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변화의 모험을 계속 할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행한 일은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일 따름입니다.
나에게는 껴안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삶의 한 가운데에
나는 너무나 껴안을 것이 많습니다.」


비록 깊은 심산에 산다할지라도 마음이 시끄러우면 참다운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몸은 심산에 있지만, 마음속에 치우치고 얽매이고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마을이나 도회지에 산다할지라도 마음이 고요하면 능히 참다운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중에 살고 있어서 비록 몸은 고요하다 할지라도 마음이 탐진치 삼독을 여의치 못하면 번다한 사람이고, 분주하게 살면서 몸이 고단해도 그 마음속에 삼독심이 없으면 고요적적 한 것이며, 몸도 마음도 불편한 사람은 상락아정(常樂我淨)에 있다 해도, 항상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열반(涅槃)의 자리는 즐거운 자리인데, 그 자리를 스스로 번뇌(煩惱)로 얽매어 놓고, 참나는 부처를 지니고 사는 것인데 현상계에 매여서 두두물물(頭頭物物)의 현상이 참세상인양 생각하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항상 불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가가느냐는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로부터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석정 박한영 스님의 법문말씀처럼 스스럼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다독거려주고 거울이 돼서 비춰줄 수 있는 그런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발문1>
삶이라는 것이 생로병사이니까, 죽음이라는 것도 생로병사의 한 과정일 뿐인 것입니다. 한지에 먹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밝게 스며드는 죽음을 알게 되면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참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밝게 스며드는 죽음을 알게 되면, 지혜롭게 사는 일만 오롯이 남아서 오히려 조용하고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이라 하신 것입니다.



<발문2>
열반(涅槃)의 자리는 즐거운 자리인데, 그 자리를 스스로 번뇌(煩惱)로 얽매어 놓고, 참나는 부처를 지니고 사는 것인데 현상계에 매여서 두두물물(頭頭物物)의 현상이 참세상인양 생각하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항상 불편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가가느냐는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로부터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