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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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불자(佛子)의 삶








   정우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엊그제가 봄인가했는데 여름입니다. 여름인가 싶으면 가을이요, 가을인가 싶으면 어느새 또 겨울이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순환하는 사계절을 춘하추동(春夏秋冬)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인생에 비유하자면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같은 이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싹을 움틔우고 꽃피우는 봄은 태어남에 비유할 수 있고, 푸르름으로 가득한 여름은 청춘에 비유할 수 있으며, 풍성한 과실과 아름다운 단풍이 가득한 가을은 노년의 우리들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우리가 단풍을 아름답게 보는 것처럼 우리들 노년의 인생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지혜를 갖는 일입니다.

일타(日陀)스님의 생전 법문 중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제일 큰 부자요, 몸에 병 없으면 제일 큰 복이며, 번뇌망상(煩惱妄想) 일어나지 않는 열반(涅槃)이 제일 큰 즐거움이요, 마음 편안한 것이 제일가는 이익일세.』라고 했던 말씀도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알고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제일 큰 부자요, 몸에 병 없는 것보다 큰 복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사이든 자연의 현상계이든  하나씩 조목조목 들여다보면 연기의 법칙을 벗어남이 없고, 인연법의 소생 아닌 것이 없는 이치를 바로 알아 만족하고 자족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저는 도량을 포행하면서 법당마다 기도하고 정진하시는 불자들의 모습을 지켜볼 때면 한결같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것은 한시적인 것이다. 저 너머에는 우리들의 아름다움이, 편안함이, 넉넉함이 있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조화롭게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인생수업》이라는 책에 보면,『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내가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봄이 태어남이고, 여름이 젊음이며, 가을이 노년이고 겨울이 죽음이라고 비유했을 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으니 이제 끝이로구나󰡑 구분 짓는 것보다는 춘하추동 사계절을 자연스럽게 지켜보고 받아들이듯이 우리의 생로병사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사람의 노년이 더 편안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살을 하나 더 붙인다면,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인덴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오,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인덴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며,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그 인과(因果)의 이치를 믿고 윤회(輪廻)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현생에서 본전치기만 해도 다음 생에 이 세상으로 다시 올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을 많이 짓고 마음자리를 잘 닦아나가면 지금보다 나은 세상에, 좋은 가정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건을 들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겠습니까?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인터넷과 컴퓨터의 세상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비행기, 자동차, 핵폭탄의 출현이라고 하겠습니까?

영국의 역사가이자 문명 비평가인 토인비는 『20세기에서 가장 큰 사건이 있다면 서양에 자연스럽게 불교가 자리하고 꽃피우고 열매 맺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토인비가 카르마 즉, 불교의 업(業)의 진리를 제대로 보았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업에 대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르쳐 준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스스로 체득하고 스스로 걸어가는 길일뿐일 것입니다. 훈습으로 젖어서 행해지는 나의 행동, 이것이 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든 업이 자작자수하고 자업자득하며 자승자박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업은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을 우리는 또 알아야 합니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중에 보면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형편없는데, 크게 어려움 없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만 보고 업을 부정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 생의 업이 결정되어서 드러난 것일 뿐, 결정된 업은 현세에 받기도 하고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또 그 후생에서 받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결정되지 않은 업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인연이 합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합해지면 결정되는 것이고, 결정되지 않은 것은 인연이 합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할 업의 진리는 착하게 살면 천당 가고, 올바르게 살면 극락 간다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현상계의 모습에 갇혀서 벌벌 떨며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분향례(五分香禮)의 첫 대목에 나오는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 무슨 뜻입니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통해서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번뇌망상을 끊어버릴 수 있는 지견을 지니게 되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가르침이요 이치라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즉, 지혜 있는 이는 환생(還生)할 것이고 어리석은 이는 윤회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데, 계정혜 삼학을 닦는 이는 육도를 다닐지라도 환생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장보살이 지옥에 가신 것이나 관세음보살이 우리와 함께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계신 것을 가지고 업력중생의 행보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계정혜 삼학의 결정체가 환생이라는 것입니다. 즉, 원하는 바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탐진치 삼독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은 업력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올수도, 갈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업은 현재의 모습과 생활의 삶을 결정하고 현재의 업은 과거의 업과 합해져서 미래를 결정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가르치기를, 『현재는 과거의 아들딸이요, 현재는 미래의 부모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인데, 업력으로 윤회하는 중생들은 영원히 내일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열심히 산 사람이 어제 잘 산 사람이고 오늘 열심히 산 사람은 내일도 열심히 잘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오늘을 살다 오늘 떠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현재를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이음새는 단절된 시간으로 나투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진치 삼독을 비롯한 온갖 번뇌망상에서 벗어나고자한다면, 무지몽매한 어둠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자 한다면, 만족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는 것을 서양 사람들은 명상한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도한다, 참선한다, 수행한다, 정진한다고 합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분별식심 일으키지 않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날 나는 진정으로 불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시기 전에 태어났고, 부처님이 오셨다 가신 뒤에 태어났고, 불법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고 박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불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깨친 자의 모습을 부처님이라고 하고 깨친 자의 가르침을 법이라 하고 깨친 자의 행동을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꼭 불교를 믿어야 깨우치고 불교를 안 믿는다고 해서 깨우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 믿는 사람만 극락 가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면 천당 가고 올바르게 살면 극락 간다는 말씀입니다.
단지 불교를 믿으면, 밥상머리에 앉으면 밥 먹기가 수월한 것처럼 도움이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명상을 하는데 좌선자세를 잡는 것이 도움이 되고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앉아있다고만 해서 참선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닦지 않고, 복 닦는 것을 도 닦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은 달라고 빌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복은 비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입니다. 기복불교(祈福佛敎)가 아니라 작복불교(作福佛敎)가 있을 따름입니다.
아무리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가 그 바라밀다를 통해서 보살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 탐진치 삼독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맑히고 밝히고 보듬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버리는 공부를 언제 해야 하는지󰡑를 물은 제자의 질문에, 『어리석은 사람은 반야지혜를 닦아야 하지만, 지혜가 좀 드러났다고 해서 교만해지면 반야지혜 닦는 걸 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더 닦으면 더 교만해지기 때문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관사유법인 선정삼매를 닦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선정삼매를 닦는데 반야지혜가 없어서 결정할 수 없을 때는 반야지혜를 닦고, 선정삼매와 반야지혜가 둘이 아니지만 이것이 조화로울 때 버리는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확신을 가지고 믿어야 할 것은 진정한 재물은 많이 가지고 있다고만 해서 부자라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는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인색하고 옹색한 사람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선근이 부족하거나 복이 부족하거나 지혜가 부족합니다.
사는 방식이 사는 순서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받고 모으면 더 큰 것이 뒤따라서 오게 됩니다. 그러나 단 거기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도에 그만두지 말고, 변덕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과 확신이 있으면 차근차근 한 계단씩 오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불자들이 꼭 지켰으면 하는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발심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건 시주를 하건 공양을 하건 불사에 동참을 하건 스스로 마음을 내서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는 상대가 원할 때 하고, 셋째 가르치기 위해서 하며, 넷째 잘 된다고 방심해서는 안 되고, 다섯째 가난하다고 얕보면 안 되며, 여섯째 한가하다고 놀러 다니지 말며, 일곱째 한 푼을 벌기 위해서 천리 길도 갈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살았으면 합니다.
『넓은 들판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물이 맑고 깨끗해도 쓰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말라 없어진다』고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부처님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무리 귀한 재물일지라도 어리석은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써보지도 못하고 벌벌 떨다 남을 위해서 베풀지도 못하면서 죽음과 함께 모두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재물을 얻으면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쓸 줄도 알고 베풀 줄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지혜롭게 살아가는 불자가 되도록 함께 노력 하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