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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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품안에서의 행복한 삶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영축총림 통도사는 부처님 정골사리(頂骨舍利)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어서 기도를 하기 위해 1년 내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룹니다. 특히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달이면 기도와 불공을 올리기 위해 더 많은 불자들이 통도사를 찾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월에 꼭 가고 싶은데 바쁜 일이 있어서 못 오는 이도 있고, 직장 때문에, 학교 때문에, 가정일 때문에 못 오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소구소원(訴求所願)을 빌기 위해 통도사를 찾지만, 보궁을 향한 신심(信心)만은 한결같다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을 향한 신심은 모두가 똑같겠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듯이, 각자 가지고 있는 재능 또한 다양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질은 여러 겁의 생을 살아오면서 축적된 결과물입니다. 과거로부터 익힌 훈습이, 요즘 말로 마일리지가 쌓이듯 모이고 모여서 뭔가 잘하는 것을 각자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어머니를 보아도 음식 잘하는 분, 살림살이 잘하는 분, 바느질 잘하는 분, 이웃에게 잘하는 분, 가족에게 잘하는 분, 어른들 잘 섬기는 분, 아랫사람 잘 이끌어 주는 분, 언제나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을 맞이하는 분 …. 이렇게 사람들은 남들보다 잘하는 무엇인가를 한 가지 씩은 반드시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이 장점을 잘 발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도이고 발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할 때는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타고난 재능은 방치해두면 안 됩니다. 더 갈고 다듬어서 좋은 쪽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맑고 깨끗한 물이라도 그릇에 담아서 방치해두면 썩고 오염되게 마련입니다. 끊임없이 샘물이 솟도록 하는 그 이치가 바로 발원이요, 기도입니다. 그렇게 좋아서 계속 하다보면, 스스로 신명이 납니다. 그리고 가슴 벅찬 감격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좋아서 신명나는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감격스럽고 벅차고 기분 좋을 때일수록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지 않으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를 생각할 때 감격스럽다는 마음이 든다면, 한편으로는 겸손의 마음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해야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생각만으로는 중생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교만심을 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교만심을 꺾으려면 선근을 쌓아야 합니다. 지혜를 길러야 합니다. 선근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 결국 겸손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불문도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지심귀명례가 무슨 뜻입니까? 지극한 마음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 보살님께, 스님께,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마음가짐과 바른 자세로 발원과 기도를 하게 되면 복이 쌓이게 되고 그 복으로 인해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그 지혜는 다시 복을 짓게 합니다. 따라서 복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박복하며 박복한 사람은 또한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혜는 있는데 복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지혜는 지혜가 아닙니다. 간교한 꾀에 불과할 뿐입니다.
옛날 아파트의 문에 보면 작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습니다. 그 뚫린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면 밖에 누가 와있는지 보입니다. 그렇게 안에서는 밖이 보이는데 밖에서는 안이 안 보입니다. 그 구멍으로 내다봐서 보기 싫고 귀찮은 사람이 서있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자신은 밖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모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도 그 구멍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이나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욕심은 개인주의입니다. 그러나 원력은 대중적인 것입니다. 욕심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구와 욕망을 일으킵니다. 반면 원력은 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직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삶의 터전에서 진지하게 사는 사람은 갈팡질팡하지 않습니다. 횡설수설하지도, 우왕좌왕하지도 않고 늘 한결같습니다.
진실로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사람은 불안함이 없습니다. 초조와 공포, 강박관념 등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틱낫한스님의 책에 보면, 「내가 꽃과 나무에 물을 줄 때 그것은 지구 전체에 물을 주는 것이다. 내가 꽃과 나무에 말을 거는 것은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또 「한 송이의 꽃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꽃이 아닌 걸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본다.」는 글도 있습니다.

이 글의 뜻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한 송이의 꽃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꽃이 어느 날 거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더란 말입니다.
지난 해 봄, 어느 신문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사진을 1면에 실어놓고 “꽃이 진다”가 아니라, “꽃은 진다”라는 부제어를 달아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꽃이 진다는 것은 현재형이지만, 꽃은 진다는 미래형입니다.
“꽃은 진다. 청춘이 그런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아쉽기만 합니다. 섭섭하고 부족한 점이 많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음생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어찌 살았던 간에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로부터 앞으로 여한 없이 살도록 노력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지금보다 더 너그럽게 쓰면 됩니다. 모든 것을 품에 가득 안아 주면 됩니다.
한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던 꽃이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별로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꽃이 썩어서 거름이 되어 다시 꽃을 피우는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꽃을 보는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꽃이 진다. 청춘이 그런 것처럼” 하면 별의미가 없겠지만, “꽃은 진다. 청춘이 그런 것처럼”이라고 하면, 의미가 새롭게 느껴져 우리네 인생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도 「수수방원지기(水隨方圓之器)하고 인의선악지우(人依善惡之友)」라고 했습니다. 물은 젖는 성품이 있어서 어느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서 둥글기도 하고 모나기도 하며 사람은 벗에 의해서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세 번 이사한 연유도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좋은 도량, 부처님 품안, 따뜻한 가정이 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의 경계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중심에서 한결같이 기도하고 늘 함께 하면서 살아가자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어디를 가도 가는 곳은 모두가 좋은 도량이 될 것이고, 어느 곳을 가도 좋은 도반이 있을 것이며, 어느 곳을 가도 좋은 스승이 있을 것입니다.
물의 모양이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들도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 마음 잊지 말고 기도하고 정진하며 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