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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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자리에서 근본을 다하는 불자가 되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요즘 들어 제 가슴속에 잔잔하게 여울지고 있는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이란, 「올바로 잘 살면 누구든지 성불(成佛)할 수 있고, 우리가 이루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진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인생의 좌표를 설정해놓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설정된 좌표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행위들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 행위들이 올바르면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달성만을 위해 매진하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처지로 내몰리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 삶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입니다. 삼귀의(三歸依)·오계(五戒)·보살계(菩薩戒)·비구계(比丘戒)·비구니계(比丘尼戒)와 같은 견고한 그릇을 가지고 그 바탕 위에 반야지혜(般若智慧)를 드러내면, 마치 해가 동천에 솟아 어둠이 스스럼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맑고 깨끗한 식심(識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만큼 산분들에게 물어보면 대다수가 괴롭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이는 괴로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괴로워 못 살겠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사람들은 매일 매일을 고통과 괴로움 속에 내몰려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탐진치 삼독이라는 번뇌로 인해서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의 오욕락(五欲樂)이라는 망상이 죽 끓듯 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정혜 삼학을 지니게 되면 번뇌망상(煩惱妄想)을 여의게 되고 번뇌망상이 끊어지게 되면 고통과 괴로움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세상을 들여다보면 현상에 매여서 사는 우리들의 인생은 전부가 고통과 괴로움으로 범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탐진치 삼독이라면, 그것이 타고 있다면, 타고 있는 그 불을 끄면 됩니다. 타던 불만 꺼지면 끓던 물은 잠잠해 집니다. 타는 불을 꺼트리는 방법은 결국 계정혜 삼학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전도몽상(顚倒夢想)으로 드러나는 공포를 다 여의게 되고 헛된 삶으로 끄달림 당하는 그릇된 집착이나 속박으로부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유전학의 발달로 인해 요즘은 생화(生花)와 조화(造花)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화가 너무 완벽하게 아름다우니까 생화라는 생각마저도 안 들 정도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막이 많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눈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쌍꺼풀이 되어있고 눈썹도 깁니다. 수천년 동안 사막의 먼지 속에서 살다보니 몸이 자연스럽게 사막의 먼지를 이겨낼 수 있도록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또 무더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지역의 사람들은 코가 작고 위로 들려 있습니다. 그 지역은 열대지방이기 때문에 더운 기운이 빨리 들어왔다 빨리 나가야되니까 그렇게 진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진흙이 많은 데다 춘하추동 사시 절서가 분명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들보다 나은 이목구비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아이들도 쌍꺼풀이 아닌 아이가 없습니다. 눈썹도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기후와 환경, 음식, 문화의 차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염염삼독심(念念三毒心)하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삼악도의 관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가지가지 종성을 가지고 있는 모두에게 분별하지 않고 따뜻하고 편안하게 넉넉하고 너그럽게 포근하고 온화하신 분, 우리네 어버이같이 늘 감싸주시는 분, 이끌어 주시고 함께하시는 그 분이 불보살님이십니다.
우리도 부처님 같이, 우리도 부처님 제자로서 서로에게 그런 따뜻함과 넉넉함과 너그러움과 온화함과 포근함으로 감싸줄 수 있는 그러한 삶이 보살행이고 그러한 삶이 진정으로 보살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보살의 삶을 살게 되면 올바로 살고, 바로 살면 성불도 하고, 극락도 가고, 못 이룰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 제가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금강경에서 말씀하고자하는 그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나아가 삶의 자양분으로 삼으면 극락이라는 말, 성불이라는 말, 복덕과 지혜라는 말, 보살행이라는 말을 따로 구분할 필요 없이 그대로의 그 행위가 보살행이고, 바라밀이고, 삶의 진정한 의미가 내면에 받혀져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을 괴롭히는 감정적인 경험으로부터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보리심과 지혜는 짧은 시간에 기도정진이나 생각 하나하나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늘 항상한 내 모습과, 즐거운 삶의 현장의 내 모습과, 참 나의 흔들림 없는 내 모습과, 맑고 깨끗한 내 모습을 가지고 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 수행이요 정진입니다.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는 괴로울 것이 따로 없고, 고통스러울 것도 따로 없고, 슬플 것도 따로 없고, 아플 것도 따로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스스로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토(淨土)와 예토(穢土)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극락정토(極樂淨土)라는 이상향을 향해서 발원하는 기도를 할 때, ‘이 경을 독송하면 극락 간다’고 명기되어 있는 《화엄경 보현행원품(華嚴經 普賢行願品)》과 《아미타경(阿彌陀經)》이 있는데도 그런 말씀 한 구절 없는 《금강경(金剛經)》을 수지독송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열반경(涅槃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몸과 마음이 고요한 사람, 몸은 고요한데 마음이 번다한 사람, 마음은 고요한데 몸이 번다한 사람, 몸도 마음도 번다한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앞장서서 가족과 이웃 모두 모두에게 부처님의 법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바램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투영되어지는 환상을 좇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게 중생심이고, 현재 보이는 모습의 그림자를 인내와 실천이라는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커다란 기쁨이 따라야 되는 그런 삶은 익숙해지면 무엇이든 쉬워지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작은 아픔에 익숙해짐으로써 보다 더 큰 아픔도 받아들이고 참아낼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 오탁악세에서 우리들이 마음을 닦아야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은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생각 생각이야 얼마나 바른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야 되는데, 그러지를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괴리가 생기고, 이완되는 그런 모습들을 어떻게 가름을 해야 할 것인지 좀 더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참 자유를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참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서는 절대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얽매이기 위해서 불교에 귀의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의 현장에서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방종하고 방탕하고 방일한 삶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가면 불안해서 벌벌 떠는 인생이 아니라, 갔다 왔는데도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허탈하고 허망한 마음이 드는 인생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지 하는 마음으로 스스럼없이 살아가는 참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겨놓을 것도 없고 내일로 미룰 것도 없습니다. 오늘 일은 오늘 해결하게 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안 왔으니, 내일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오늘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예토와 정토를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근본을 잃지 않고 자기 도리를 다 하고자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높낮이도 있고 능력과 역량의 차이도 있습니다. 숫자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질량과 그릇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모습은 우리에게 각자 주어진 재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과 발견하지 못한 사람, 그것을 실천한 사람과 실천하지 못한 사람, 중도에 포기한 사람의 차이는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 일은, 내가 하고자하는 그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면서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불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참 자유를 누리는 인생입니다.
저는 늘 자화상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지난날의 그림자만 아직도 좇고 있지는 않느냐? 지난날의 그림자만을 좇아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그리워하는 그런 인생은 아니더냐?”
그러나 지나간 시간들을 모두 접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열심히 살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나 이웃이나 인연 맺은 가까운 이들의 소중한 그 인연을 귀하게 여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다독거려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부처님의 제자가 되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