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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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정우(頂宇)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한줄기 장맛비가 스쳐지나가고 난 뒤 바라본 영축산(靈鷲山)의 소나무가 더욱 푸르러 보입니다. 통도사(通度寺)를 휘감아 흐르는 개울 역시 물이 불어나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데도 귀에 거슬리지가 않습니다.
세차게 몰아친 빗줄기에 몸살을 앓았을 솔잎이 더 푸르러 보이고, 물의 양이 불어나 더 요란해졌을 개울의 물소리 또한 아름답게 들리는 연유는 무슨 까닭입니까?
자장율사(慈藏律師)께서 통도사를 창건하시기 전에도 영축산에는 소나무가 있었을 것이고 개울물도 흘렀을 것이며, 통도사가 창건된 이후 그 모습은 더욱 확연히 구분되어져서 오늘의 모습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통도사는 우리들에 이어 우리의 후손들과 함께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통도사를 외호(外護)하고 있는 소나무도, 개울물도 그 모습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세차게 몰아친 빗줄기에 몸살을 앓았을 소나무가 더욱 푸르러 보이고, 물의 양이 불어나 더 요란해진 개울의 물소리 또한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오묘한 대자연의 가르침에 감동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화엄경(華嚴經)》에서 『믿음은 보시(布施)가 되어 나타나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게 하며, 믿음은 능히 기쁨을 낳아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며, 믿음은 능히 지혜의 공덕을 증장(增長)시키며, 믿음은 능히 여래지(如來地)에 반드시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은 생명력이 있어야 하고, 그 생명력을 통해서 원력(願力)을 발현해야 하며, 그렇게 발현된 원력으로 정진(精進)을 하게 되면 진지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요, 신심(信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신심이라는 생명력을 가진 이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함이요, 둘째는 성내는 마음을 끊음이요, 셋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름이요, 넷째는 연민(憐愍)의 정을 일으킴이요, 다섯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이니라.』
보리심은 자기의 본심인 참마음을 의미합니다. 참마음을 지니고 있고 참마음을 일으키는 이는 이와 같이 좋은 벗을 가까이 할 수 있고, 성냄을 끊을 수 있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연민의 정을 일으키며, 진지한 자세로 부지런히 정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명제(命題)를 가지고 항상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분별이 없고, 시비가 없고, 한결같았을 때에 진정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우리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자세를 갖춘 뒤에라야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따뜻한 기운을 간직할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전해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수수지방원지기(水隨之方圓之器)요, 인의지선악지우(人依之善惡之友)라는 말씀입니다. 즉, 물은 모나고 둥근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지듯이, 가지가지 종성을 가지고 중생계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 또한 누구와 함께, 어떤 입장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착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거기에만 집착해서 스스로에 매몰된 삶을 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현재의 이 마음이 본래 착한 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는 삶일 것입니다. 다만, 수행도 하지 않고 말만 앞세우는 신앙생활과 믿음을 경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涅槃經)》에서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은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만나면 가지가지로 나쁜 업(業)을 일으키고 만일 몸에 병이라도 생기면 마음에도 병이 생기고, 몸과 말과 뜻으로 여러 가지 나쁜 업을 짓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범부중생이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만나면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중생들은 생각하는 지혜(智慧)가 없어서, 선근(善根)이 없어서 그러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본래가 선한 사람들이라는 것, 고운 모습은 선근에서 시작하며 선근이 자양분이며, 지혜로움이 보살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업이라는 것은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결정된 것은 현세에 받기도 하고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또 그 다음 생에 받기도 합니다. 결국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며,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아니한 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믿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세상이 살기 좋아졌다고 하면서도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우리와 한 세상을 사시다 열반하셨던 경봉(鏡峰)·월하(月下)·성철(性徹)·석주(昔珠)·일타(日陀)스님 같은 큰스님들이 노후를 걱정하며 사셨을까요? 그 어른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출가해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열심히 사신 흔적밖에 없습니다. 그 어른 스님들은 노후나 돈, 죽는 것, 사는 것, 세상살이 등에 관해서 일체 걱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살기가 좋아졌다고 하는 세상에서 우리들은 왜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더욱더 노후를 걱정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열심히 잘 살면 성불도 하고, 극락도 가고, 복도 받고, 세상에 안 될 일이 없는데, 늙어서 걱정할 인생을 살 것이 뭐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스스로의 삶에 고마움을 느끼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일반적인 우리의 인생을 세 단계로 나눠보면 처음 20~30년은 부모 밑에서 각자의 인생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20~30년은 서로의 짝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며 사회생활을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세 번째 단계의 20~30년은 그 생을 마무리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의 인생은 길게는 90년, 짧게는 60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그 인생을 잘살고, 노후걱정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몫입니다. 따라서 결코 짧지 않은 각자의 인생 속에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스스로가 되어야 합니다. 거울 앞에 앉아서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지금의 내 모습이 진정으로 내가 바라던 모습인가를 한 번 더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내 모습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이고, 오늘 살고 있는 내 인생이 또한 내일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기의 모습을 찾는데 시간할애를 해보십시오.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미래의 인생 때문에 쩔쩔매지 말고, 인연이 합해지면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금생에 복을 지을 수 있는 나로 전환을 해야만 합니다. 복은 비는 것이 아니고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도 “진정으로 선근과 지혜를 드러내서 자비심을 가지고 살려고 한다면 물질을 나눠주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자비심으로 마음이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장 빵 한 조각과 밥 한 그릇이 필요하고, 노숙자에게는 당장 컵라면 한 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날마다 빵과 밥, 컵라면을 주면서 객체적(客體的)인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부에게 물고기 몇 마리 잡아주는 삶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하고, 가난한 농부에게 우선 당장 겨울을 날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진정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고 싶거든 먼저 자기 내면의 변화를 가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족이 변화할 것이고 거기서 범위가 점점 넓혀지면 세상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현생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가지 못하고, 단지 인생의 업적과 영적인 씨앗만 안고 간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 업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업덩어리인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의 자비심(慈悲心)인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각자의 행동에 따라 한쪽은 안락국(安樂國)이 되고 한쪽은 삼악도(三惡道)가 된다는 그 이치를 충분히 인식했으면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없는 일만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는 일만을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불자(佛子)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바뀌어가고, 가져간 만큼 돌려 줘야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인과법(因果法)의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 없는 기도를 해야만 하고, 기다릴 줄 아는 불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머무를 일 없이 일어났다 사라져버리는 것이 중생의 생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것 또한 별것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다보면 작은 깨달음도, 큰 깨달음도 얻게 됩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좇아가는 객체적인 인생이 아니라, 스스로가 당당하게 살면 그림자와 같은 허상(虛相)은 언제든지 자신이 가는대로 따라온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이성적(理性的)이고 주체적(主體的)인 삶을 살아가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