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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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교육의 현대화, 한글 염불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1.
“서울 가면 로데 오거리라고 있다는데….”
영화 <똥개>에서 주연 역의 철민(정우성 분)이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를 ‘로데’라는 이름의 오거리로 말해 웃은 기억이 있습니다. 외래어 ‘로데오’를 알지 못하고, 삼거리 사거리 오거리라는 우리말에 친숙한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오해입니다. 


#2.
내 유년시절, 모친은 첫새벽 정안수를 떠놓고 반야심경을 암송하곤 하셨습니다. 독학으로 한글을 깨친 당신은 한문 원문과 해설 위에 한글 음을 달아 만든 해설판 반야심경의 묶음 매듭이 해어지도록 독송을 거듭했고, 마침내 그 암호문 같기만 하던 270자 ‘불교의 꽃잎’들을 순서대로 암기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끊어 읽기였습니다. 3·4(4·4)조 혹은 7·5조 전통 운율에 맞춰 시조 읊듯 암기한 탓에 당신의 염송은 “조견오온개공도 / 일체고액사리자 / 색불이공…”식이었고, 수없이 그 염불을 듣고 자란 저는 지금도 “조견오온개공 / 도일체고액”식으로 이어지는 스님들의 올바른 염불을 들으면, 답안지에 정답을 한 칸씩 밀려 쓴 듯 불편해지곤 합니다. 몸(귀)의 기억이 머리(혹은 마음)의 이해를 억압하는 겁니다.
훗날 글공부라는 걸 조금 한 뒤 모친께 그 얘기를 꺼내본 적이 있습니다.
“띄어 읽기가 잘못된 것 같아요. 한자 원문을 보니….”
하지만 모친의 생각은 단호했습니다.
“상관없어. 정성이 중요한 거지, 그 뜻이 어디 가나.”
이후로도 내내 모친의 반야심경은 당신만의 운율을 고집스레 이어갔고, 나는 목청 좋은 여느 큰스님의 염불소리보다 모친의 그 ‘야매’ 염불이 더 편안합니다.


#3.
조계종 교육원이 승가교육 현대화 조치의 하나로 한글 염불을 내놨습니다. 올 하반기부터는 승가대학, 선원 등지에서 기본교육을 받는 예비승과 행자들은 의무적으로 한글염불의례교육을 받게 될 모양입니다. 앞서 지난 3월 조계사에서 열린 ‘자성과 쇄신 결사 입재법회’에서 스님들은 한글 반야심경을 독송했고, 지난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에서도 한글 경전이 봉독됐습니다. 교육원 교육부장 법인스님은 이 조치가 신도들과 잘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염불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감동을 줘야 하는데 기존 한문 염불은 암호문 같아서 내용 이해가 안 돼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글 반야심경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문외한이 읽거나 들어 바로 그 의미를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불경의 문턱이 표나게 낮아진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적어도 제 모친의 반야심경 인연이 저 한글판으로 시작됐다면 띄어 읽기의 오류는 없지 않았을까요. 물론 모친께는 어쨌거나 상관없는 일이겠고, 당신의 18번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가락에 반야심경 구절을 얹어주지 않는 본디 가락을 포기할 리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제 모친처럼 한문 염불이 입에 익은 스님들 역시 저항감이 있었던 듯합니다. 마음으로는 수긍하지만 몸(혀)이 버티는 힘이 만만찮았던 게지요. 법인스님은 “몇 년 전에 몇몇 사찰에서 한글 염불을 시도해봤는데 스님들이 전부 한문으로 염불을 배워 정착이 잘 안 됐다”고 하십니다. 해서, 아예 교육 단계에서부터 한글 염불을 익히게 하겠다는 것이죠. 표나는 반발은 없지만 심정적인 반감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볍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밥 딜런의 노래 ‘A hard rain’s gonna fall’을 즐겨 듣던 이에게 이연실의 번안곡‘소낙비’는 아우라가 없어 보이고, 레너드 코헨의 ‘Dance with me to the end of love’를 최고의 명곡으로 꼽는 이에게 ‘벙어리 바이올린’은 그럴싸한 하나의 버전 정도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4.
물론 종교 경전과 가요를 그 의미나 형식 면에서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고 명분이 바르다고 해서 저항감을 가볍게 여기는 것 역시 경계할 일입니다. 라틴어 성경만이 존재하던 서양 중세사회에서 영어 성경번역은 기성 교단 입장에서는 이단의 도전이었고, 역사적으로는 종교개혁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이자 당대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던 위클리프(1330~1384)는 사제들만 이해할 수 있는 라틴어 성경을 서민들에게 읽히고자 영어로 번역했다가 교계에서 추방당했고, 훗날 영어판을 읽다가 이단으로 몰려 처형된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독점하던 중세의 성직자들 입장에서 영어판 성서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직자의 타락상을 대비해 보게 하는 위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면죄부 장사에도 지장이 있었을 테고요.
어쨌건 영어판 성경은 보편화합니다. 거기에는 구텐베르크의 금속인쇄술 발명이 크게 기여했다고 합니다. 번역이 됐다고 해도 고가(高價)의 필사본은 아무래도 서민들이 지닐 수 없는 성물이었는데, 비교적 저렴한 인쇄본이 등장했던 것이죠. 인쇄술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숨은 공신이기도 했습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에 맞서 발표한 95개조 반박문은 인쇄의 위력으로 급속히 유럽 전역으로 전파됐고, 그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신의 최고의 은총이다. 그 덕분에 독일이 로마의 족쇄로부터 풀려날 것이다”라 했다고 합니다. 영어판 성경이 등장하면서 각국은 잇달아 자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말씀의 세례를 직접 입은 당대의 평신도들은 루터의 말처럼, 오랜 문맹과 맹목적 복종의 사슬을 벗어나 성직자들의 지식 독점구조를 부수고 지식혁명과 근대 국민국가로의 힘찬 행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경전 번역이 중세 기독교에서처럼 종교 기득권층의 이해와만 충돌했던 것은 아닙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저 유명한 말처럼, 한 텍스트가 다른 언어로 수레를 옮겨 타게 되면 그 과정에 최소한의 의미론적 변화(혹은 변질)는 불가피합니다. 전래의 교리에 유난히 엄격한 무슬림의 꾸란(코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보수적인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경전 꾸란의 번역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아랍어 원어 경전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이슬람 국가들 역시 번역 꾸란의 권위를 아랍어 원전보다 노골적으로 낮잡고, 그래서 인도 파키스탄 등 비 아랍권 무슬림 신자들은 유일신 알라의 신성한 말씀을 그 언어 그대로 읽기 위해 아랍어를 배웁니다. 말씀의 고유 운율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받들기 위해서지요. 기독교의 경우에도 문맹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도입된 이콘(성화·성상)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침묵의 설교’로 인정받기까지 꽤 긴 진통을 겪은 바 있습니다.  
 
#5.
요컨대 염불 한글화- 또 앞서 90년 전에 처음 등장한 한글판 불경(용성 스님의 금강경)-는 인류 종교 역사와 수천 년 문화사를 관류하는 큰 연원과 맥락 위에서 이해해야 하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세상이 달라져 물리적 충돌과 같은 옛 불상사는 반복되지 않겠지만 불가에 인연을 둔 이들의 심성에서는 적잖은 파문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또 한국 불교사에서도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시도인 것도 분명합니다.
이 소통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한국 불교 대중화 및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600년 역사의 영어 성경이 3500년 전 구약의 언어를 갈고 닦아 오늘에 이어온 것처럼, 100년 역사의 한글 성경이 지금껏 끊임없이 개정을 거듭해온 것처럼, 불경의 한글판 역시 제 모친 세대나 지금 젊은 세대의 심성과 고유의 율조에 얹혀 노래처럼 독송되고 암송되려면, 더 쉽게 그 말씀의 진수를 전달하게 하려면 갈 길이 멀고 험난할 것입니다.
그 숙제 역시 오늘의 불교인들이 짊어지게 됐습니다.


600년 역사의 영어 성경이 3500년 전 구약의 언어를 갈고 닦아 오늘에 이어온 것처럼, 100년 역사의 한글 성경이 지금껏 끊임없이 개정을 거듭해온 것처럼, 불경의 한글판 역시 제 모친 세대나 지금 젊은 세대의 심성과 고유의 율조에 얹혀 노래처럼 독송되고 암송되려면, 더 쉽게 그 말씀의 진수를 전달하게 하려면 갈 길이 멀고 험난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