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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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연기의 논리학이자 삶의 과학
인도 다람살라 = 가연숙

6월의 다람살라는 완연한 여름이다. 이 시기 쯤 되면 고대 불교왕국 라다크로 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다람살라는 그 여정의 길목이 된다. 더욱이 중남부 인도 지역의 사람들이 폭염을 피해 다람살라를 방문하는 절정에 이르는 시기가 요즘이다. 지난 5월 20일에는 인디아프리미어리그(IPL) 크리켓 경기가 다람살라서 열리면서 14대 달라이라마(텐진갸쵸, 76세)가 관전한 모습이 인도 전역에 생중계된 여파로 이래저래 북적이게 된 인파는 다람살라가 휴양지임과 동시에 종교적 성지임을 알리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6월은 인도 전역의 학교가 방학 기간이다. 2007년도부터 매년 방학 시즌이면 달라이라마는 학생들과 함께 불교 입문과 개론학의 시간을 가져왔다. 올해도 변함없이 3~4일 양일에 걸쳐 TCV(Tibetan Children’s of Village)강당에서 5회째 맞이하는 법회가 열렸다. 인도 전역 78개 학교에 재학 중인 3천여 명의 티베트인 학생들이 이 기간 동안 달라이라마와 함께하는 법회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일반 티베트인들이 달라이라마와 마주하는 기회는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반인들과 외국인들은 외부에 마련된 회관에서 모니터와 라디오를 통해 시청해야만 했다.
이날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의 미래를 주도할 청년들에게, 나가르주나의 <만물을 초월하신 붓다 찬탄문 (HYMN TO [THE BUDDHA] THE WORLD TRANSCENDENT)>을 교재로 티베트 망명정부의 민주주의 필연 과제와 인간의 존엄한 가치 그리고 바른 불교도가 지녀야 할 믿음의 자세를 법문했다.
(다음은 법문 요지)
삶을 항해하는데 경험은 지도와 같습니다. 불행히도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은 물질의 흐름을 추종하면서 삶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이동이 인간으로서 지향할 바를 선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돈의 중심에 필요 이상으로 인적 자원이 몰리게 됐고, 인문학이나 정신 탐구와 같은 영역은 오히려 인재가 고갈됐습니다. 정신이 옳고 그름의 잣대를 판단하는데 그 투명성을 많이 잃음에 따라 직면하게 된 다양한 문제들로부터 바른 해결책을 구하는데도 현명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지혜보다 지식을, 정신보다 물질을 추종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입니다.
시나브로, 인간관계는 더욱 각박해졌고 사회 도처에서 곪은 상처들이 시시각각으로 터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뉴스를 보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주기 보다 오히려 상실과 공포로 인해 관계의 단절을 야기하면서 돌이키기 어려운 불안과 허무만 조성했습니다. 배움의 전당에서 지식을 공유하던 동료를 정당한 동기 없이 총으로 무차별 살인하거나, 진로에 대한 압박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물질적으로 과대 성장한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례들은 미디어에서 조차 공정성을 상실한 채 여과 없이 방송했고 우리는 별천지가 펼쳐진 것 마냥 충격감에 휩싸일 뿐이었습니다.
배움을 구하는 학생은 가족이라고 하는 기초 단계의 공동체에서 확대된 사회 진출 이전의 교육기의 지적 성장 단계입니다. 일종의 사회의 간접 경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우리는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고 사회와의 소통을 준비하며 진정한 인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슬기로운 이는 이곳 지성의 전당에서 신기루 혹은 환상의 총체적인 것들과 비교되는 실상의 가치에 대한 흥미를 일깨웁니다. 마치 땅속 깊이 간직해왔던 씨앗을 마침내 발아하듯 숭고한 도전의 서막이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를 바르게 알고 믿음을 수행하는 이들이라면, 언제나 평온함을 유지하도록 스스로를 외부의 현상들로부터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안정감은 약에 의존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자극적인 외부에 집착되어 버리거나 그와는 정반대로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서도 옳지 않습니다. 뇌와 마음 그리고 신체가 삶의 길 위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항시 상호간의 균형을 요구합니다. 그 방법이 붓다의 경전이며 역대 선지식들의 논서입니다. 불교도가 지닐 수 있는 수승한 멘토(mento)이지요.
티베트불교와 결연을 맺고 있는 몇몇 대학에서 마음과 두뇌에 관한 연구 작업을 했습니다. 요점은 물질주의가 정신적으로 두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해서였습니다. 외적으로 부를 누리는 이들은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됐습니다. 물질적 영위만을 추구해 절대 영적인 것의 관심을 상실해 무관심해졌거나, 역으로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로서 정신과 마음의 안정과 성장을 구하고자 시도하는 양립적인 추구 형태였습니다.
일전에 한 인도 정치인이 나에게, “인도의 민주주의 정부 수립의 성공 원인은 전통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정신과 철학이 굳건한 뿌리를 내려 이를 근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라고 조언한 것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적 삶의 방식에 존경을 표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한 이유입니다.
4천년의 종교 역사는 철학을 근간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한 때 수피즘의 한 인도인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영혼(소울)과 산스크리트의 아트만(자아)에 대해 집중 토론하게 됐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시작이 있는가’ ‘나의 끝은 있는가’가 핵심 주제였습니다. 불교에서 ‘나’에 대해 정의할 때는 절대 독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인연의 화합에 따라 끊임없이 생하고 동시에 멸하는 에너지 생멸의 흐름입니다. 나의 신체는 나의 탄생과 함께 인연 지어진 화합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매 순간 창조됨과 동시에 파괴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멸하기에 의존할 신 혹은 창조주는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태초를 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늠할 수 없는 순간순간의 무수한 태초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탄생을 일종의 에너지의 폭발인 빅뱅의 형태에 비유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21세기, ‘나’에 관한 물음은 정신과학과 생물학 그리고 종교학의 잣대로 논의됨이 최선입니다.
행복의 가치는 강도와 크기에 서로 차별되지만 기본적인 조건은 모두 동등합니다. 우리 티베트인들이 일상에서 주로 행하는 기도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게 하소서(샘째담째데와또빠쇼).”이지요. 참으로 훌륭한 서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다수 신앙을 가진 이들은 부군의 승진, 자녀의 성공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에 반하면 말이지요. 그나마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본인은 잘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못내 아쉬운 것은 티베트인들의 일상은 지극으로 기도만 할 뿐이지 사회 공동체에서 다수의 행복을 위해 몸소 실천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기도는 내뱉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의 서원이 울림통이 되어 우리 삶 속에서 파장으로 펼쳐져야 합니다. 종교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불과 천 년 전에서야 행복의 실현화 문제에 대한 핵심으로 사랑과 자비가 실천화, 그리고 생활화되었습니다.
모든 음식은 사실 같습니다.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지요. 문화와 환경의 차이에 따라서 나의 취향에 맞는 음식도 가려졌습니다. 티베트의 법왕 송첸캄포가 불교를 도입할 당시, 중국불교와 인도불교가 모두 양존했습니다. 사실 중국으로부터 도입하는 불교는 훨씬 쉽게 잘 정제된, 보기에도 좋은 음식과 같은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송첸캄포는 인도 나란다승원으로 부터 어렵게 산타락시타 스승을 모셔 스승 파드마샴바바와 함께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저본으로 티베트에 불교를 정착시켰습니다.
중국 음식들은 맛도 좋고 그 종류 또한 다양한 것처럼 중국불교 역시 그 음식과 같은 형태입니다. 심지어 위경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티베트불교는 인도의 라이스(밥)와 달(콩죽의 일종으로 삶은 콩을 잘게 다진 양파와 토마토와 섞어 기름에 볶음)처럼 그리 먹음직스럽지 않은 간소한 음식을 선택했습니다. 왜일까요. 풍요로운 인도철학의 토양에서 성장한 불교철학과 대론으로 얻어지는 명쾌한 해답은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충실한 기본과 원전이 근본 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곡되지 않고 과장되지 않은 정수가 담긴 인도 나란다승원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승된 것이 바로 티베트불교입니다.
오늘 우리는 21세기에 걸맞는 불교도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우리가 자주하는 파드마샴바바 찬탄 진언 ‘옴마니빠메훔(연꽃 위의 보석이여)’에 몰입하다보면 어느새 속도를 타 ‘마니,마니’만 읊조리게 되지요. 이를 티베트불교에 문외한 외국인들이 들으면 ‘머니,머니(돈,돈)’로 착각해 “티베트불교도들은 돈만 밝히더라.”고 오해하기도 한답니다. 바른 불교도라면 이런 오해를 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는 불교도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타종교인 혹은 비종교도가 불교에 관심을 갖고자 했을 때 우리는 바른 불교를 이해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타인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불교도 스스로가 사성제와 열두 가지 연기법 그리고 팔정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난해 인도 지스파(jispa) 지역으로 법문하기 위해 향하는 길에 잠시 휴식 차 들른 켈롱마을(keylong)에서 차 공양을 올리는 여인을 만나게 됐습니다. 나는 물었지요. “붓다가 누구인가요?” 여인은 수줍게 답하기를 “잘 모르겠는데요. 하나님이나 붓다 모두 같은 이들이지요.”라는 답을 했습니다. 무지한 믿음은 몽매한 맹신만을 낳을 뿐입니다. 부디 바르게 불교를 알고 믿음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불법을 일상에 응용해 활용할 줄 아는 불자야말로 21세기의 이상적인 모범불자입니다.
반면 믿음을 강요하지는 마십시오, 종교는 민족의 역사와 환경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름의 문화에 적절한 종교가 자연스럽게 성장한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각자의 일상에서 이해되고 공감될 때 순조롭게 일상으로 동화되는 것이 종교입니다.
배움을 구하는 길 위에서 여러분은 순항중입니까?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창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얼마나 국제 정세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가에 관해서도요. 급변하는 모든 정치와 경제 전반의 현상들 중심에는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열쇠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장은 자본주의 경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고도의 영적 성장이야말로 우리 티베트불교만의 자랑스러운 차별화된 가치입니다.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 그리고 깨달음을 구하는 바른 공동체는 절대 분열되거나 종말하지 않습니다. 공(空)의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일상에 산재한 괴로움의 요소들로부터 긍정의 힘을 일깨우는 것은 무지의 어둠을 밝혀줄 작은 등불을 손에 든 것과 같습니다. 부디 당신이 지닌 지혜의 등불을 높이 들어 올려 더 많은 대중이 실상의 지혜를 구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차별과 차이의 갈등 안에서 공존의 공감대를 발견할 때 붓다께서 열반을 통해 보이신 이상이 우리의 일상에서 구현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