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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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연 만드는 것도 수행

전봉준
자유기고가

경주역에 내려 경주시 안내 지도를 살펴봤다. 눈에 들어보는 대부분의 관광지가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불국사, 석굴암, 분황사, 골굴사, 남산 칠불암 마애불, 황룡사지 등등. ‘불교성지’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택시를 타고 기림사로 향했다. 산과 호수를 지나 30여분을 달리니 어느새 함월산 자락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울긋불긋 물든 단풍들이 소박하게 사람들을 맞이한다.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며 <금강경>을 설했던 기원정사의 숲(祇林)과 같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어서인지 키 큰 나무들이 많고 숲이 울창하면서도 단정하다.
기림사 종무소에 들러 송암동춘(松菴東椿) 대종사가 머무는 암자를 물으니 절 뒤편 너머로 좀 더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토굴이 스님의 주석처란다. 논과 밭을 지나 5분여를 걷자 조그만 황토집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동춘스님의 토굴 서장암이다. 대종사(大宗師)가 머무는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촐하다. 
스님은 마침 점심공양 후 포행을 하고 토굴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팔순의 나이지만 가벼운 걸음걸이가 활기차다. 
스님이 토굴 안으로 일행을 안내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 너머에는 작은 주방과 방 2개, 화장실이 오밀조밀 붙어있다. 작은 방에는 각종 책이 쌓여 있고 큰 방은 숙소 겸 정진장이다. 절을 올리니 스님은 다정한 미소로 “매사에 좋은 인연 만들어 가세요!”라고 덕담을 해 주신다. 갑작스럽게 법을 청하러 온 객을 부끄럽게 하는 따뜻한 말씀이다.
스님의 방에는 다른 스님들의 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찻상 하나도 없다. 스님은 “대접할 차도 없다”며 “냉수 한잔 떠 드릴까?”라며 웃는다.
평소에도 스님은 목이 마르면 냉수 한 잔 들이킬 뿐이다. 짠 음식을 먹지 않으니 물을 마실 일도 많지 않다. 공양도 물론 직접 해 먹는다. 기림사까지 멀지 않지만 절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모든 것을 스님이 직접 해결하고 있다.
동춘스님은 “궁금한 것은 다 물어보라”며 자리에 앉았다.


-큰스님의 출가인연이 궁금합니다.
“내가 처음부터 출가를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찰을 좋아하다보니 출가 전부터 사찰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에 찾아 갔습니다. 며칠 머물러보니 스님 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출가 직전에는 스님 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사회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서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해서도 갈등을 많이 했지요. 그래도 전생에 인연이 있었는지 스님이 되었습니다. 1955년 석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처음에는 부산 마하사에서 생활하다 1956년 선암사에서 계를 받았습니다.”
출가하기 전 공주 마곡사, 대전 신광사 등을 다니기도 했던 스님은 본격적인 출가생활을 선암사에서 시작했다. 선암사는 경허스님의 제자인 혜월스님이 선 채로 열반에 든 곳이다. 혜월스님은 이곳에서 수많은 수행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소를 훔쳐간 도둑을 제도해 되돌려 보낸 일화나 평생 일군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준 얘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행자시절 공부일화가 많을 것 같습니다.
“출가하면서 오직 공부만 하겠다는 마음이 강해 선방에 가고 싶은 생각이 컸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행자는 선방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절집 허드렛일은 다 행자 몫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님’만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인연이 있었는지 나중에 선배스님들이 선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줘 공양주 소임도 보면서 틈틈이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행자시절을 보냈습니다.”
행자시절부터 선방을 드나들어서인지 스님은 아직도 불교의식들을 잘 모른다고 했다. 따로 배우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주지를 볼 때도 그렇고 의식을 집전할 일이 있으면 꼭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수행만 열심히 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했다. “정진만 잘하면 됐지 무슨 염불이냐?”는 것이다.


-은사이신 석암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은사스님에 대해 제가 얘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은사스님은 스님 나름대로 열심히 정진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은사스님을 스승으로서 존경할 뿐입니다.”
은사스님을 한껏 추켜세우는 다른 스님들과 달리 스님은 석암스님에 대한 말을 극도로 아꼈다. 평소 다른 사람에 대한 평을 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스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석암스님은 앞서 말한 혜월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혜월스님이 경허스님의 법을 이었으니 경허-혜월-석호-석암스님으로 이어진 법맥을 동춘스님이 잇고 있다. 동춘스님의 사제(師弟)들로는 지리산 서암정사 원응스님과 부산 내원정사 정련스님 등이 있다.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우주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니 사람들이 어리석게 사는 것입니다. 불교는 자신을 알아가는 자각(自覺)의 종교입니다. 어떤 대상을 경배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수행이고 깨달음입니다. 자기를 바로 알 때 진리는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자신을 알면 미래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화두로 공부를 하셨나요?
“선암사에 있을 때 설봉스님이 같이 계셨습니다. 수행을 열심히 한 설봉스님에게 처음 화두를 받으러 갔더니 안 주셨어요. 그래서 삼성각에 가서 혼자 정진 했습니다. 어느 날 설봉스님이 저를 칠성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때서야 화두를 주셨습니다. 화두를 제대로 들어야 공부가 됩니다. 오래 앉아있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심(發心)이 되었을 때의 그 마음으로 한다면 공부는 쉽게 될 것입니다.”
동춘스님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했다. 어떤 화두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쾌스천 마크)’일뿐이라며 끝내 알려 주지는 않았다. 


-스님께서는 경계를 느끼셨습니까?
“경계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대오(大悟)를 해야 말할 수 있습니다. 지견(智見)이 열렸다고 해서 생사(生死)까지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지견만 열렸음에도 깨달았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나중에 눈감을 때 고생합니다. 자신의 거짓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오할 때 까지는 묵묵히 수행해야 합니다. 경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닙니다. 참으로 도를 이룬 사람들은 떠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초야에 묻혀 살 뿐입니다. 대중을 속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사소한 일로 화를 많이 냅니다. 많은 사고의 원인이 바로 ‘화’에서 기인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요?
“요즘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로 싸웁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며 싸웁니다. 남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니 더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을 모르니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나보다는 남의 입장에서 자신을 살펴보는 마음이 많이 필요합니다.”
스님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화를 멀리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나의 허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저 사람이 잘못한 것은 나에게 책임이 없는가? 이런 것을 먼저 봐야 합니다. 그리고 늘 좋은 생각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차분해 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봉암사를 지금의 수행도량으로 만드는 데 스님께서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
“80년대 초반 봉암사에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지스님이 국립공원 문제가 불거지면서 잠적해버렸습니다. 대중들의 구심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 해인사 원로로 계시는 도견스님이 봉암사에 같이 있었는데 선암사 주지를 맡아 봤던 저에게 계속 주지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공부하러 와서 다시 주지를 맡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대중들은 계속 주지를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주지는 인품과 말재주, 지식 등 3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주지를 맡기도, 그냥 떠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중들이 계속 주지를 맡아달라고 해 저는 임시 주지를 맡겠다고 했습니다. 공식 주지가 올 때까지만 맡겠다고 한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선방에 잠시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양산을 국립공원에 편입시킨다는 얘기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선방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반대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희양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대중들도 공부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먼저 당시 총무원장이던 석주스님을 모시고 건설부장관을 만났습니다. 처음 정부는 봉암사 인근 500m만 공원에서 빼주겠다고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단식 9일째에 채문식 국회의장 비서를 만나니 봉암사 인근 2km까지는 빼주겠다고 합니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 우리들의 수행처를 빼앗기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저는 완전히 공원지정이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단식을 계속했습니다. 당시 언론에 나는 ‘한국불교를 위해 순교하겠다’고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다행인지 언론들이 기사를 잘 써주고 도와주면서 정부가 결국에는 국립공원 지정을 철회했습니다. 그 이후 봉암사 토지 문제가 생겨서 할 수 없이 정식으로 주지 임명장을 받아 4년간 주지를 했고 그 이후에도 몇 개월 더 소임을 봐 한 5년 정도 봉암사 주지를 맡아 보았습니다.”
당시 봉암사에서 스님은 도견스님을 비롯해 종정을 지낸 서암스님, 원로의원 고우스님, 불교환경연대 대표를 지냈던 수경스님 등과 함께 정진했다고 한다. 국립공원 지정을 막아낸 스님은 주지를 지내며 봉암사 선원과 요사채 불사를 원만하게 마무리 하는 등 오늘날 조계종립 특별선원 봉암사를 만드는 데 큰 몫을 해냈다. 스님은 봉암사 공식 주지를 1984년부터 89년까지 수행했다. 이후 1994년부터 1년여 간 봉암사 주지를 한 차례 더 역임했다.
동춘스님을 비롯한 당시 대중은 정말 ‘죽기 살기로 싸워서 봉암사를 지켜냈다’고 한다.
작은 토굴에서 만난 동춘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의 큰 뜻을 망설임 없이 설명해 나갔다. 말씀 중에 느껴지는 겸손함과 자비로움은 듣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모를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함월산 골짜기에서 묻혀 지내고 있지만 대중들의 등불이 되는 동춘스님과 같은 ‘작은 거인’들이 있기에 한국불교는 여전히 희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