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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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십시오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친지 가운데 한 분이 두어 달 전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황망히 휴직원을 내고 직장을 쉬게 되는 바람에 그 분의 발병 소식을 며칠 뒤에야 듣게 된 동료도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 다수의 첫 반응은 ‘설마 그럴 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동료들이 정기 건강검진 결과보고서를 들고 성인병을 걱정할 때도 여유만만했던 분이고, 담배는 커녕 남들 다 마시는 술조차 달가워하지 않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따금 들려오는 소식은 더 울적했습니다. 암 세포가 여기저기로 전이돼 수술이 힘들다더라, 폐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악질에 속한다더라, 항암치료 효과도 기대하기 힘들다더라…. 장가를 늦게 들어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를 둔 40대 후반. 어렵사리 중도금 부어가며 기다려 온 새 아파트 입주도 얼마 안 남았다는 얘기도 들렸던 것 같습니다.
주변 동료들이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우선 발병 사실이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그가 계획하고 있었을 1년 3년 5년 뒤의 삶과, 마땅히 누리게 될 것이라 믿었을 자잘한 일상의 행복에의 꿈들이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레 겁에 질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했으니 당사자의 심정은 오죽 했을까요. 부정, 분노, 우울증, 소외감 등등 임상심리학자들이 분석해둔 암 환자의 심리추이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종의 영혼의 공백상태를 느꼈노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아이가 돼버린 듯 의사에게 매달리고 싶더군. 실제로 아이처럼 물어보기도 했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가족에게는 말을 해야 하는 거냐’고. 뻔한 대답밖에 없을 그 질문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더라.”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면 인간의 영혼은 마치 SF영화 속 우주선처럼 워프 항법(WARP Navigation·시공간을 초월하여 먼 거리를 최단거리로 단숨에 이동하는 항법)으로 유년의 시간 속으로 도피(퇴행)하거나, 가장 높이 있는 초월적 존재에게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나 봅니다. 역시 암 투병중인 소설가 최인호씨가 신앙에 의지해 항암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맞서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멋지게 지탱하고 있는 모습도 우리는 최근 뉴스를 통해 접했습니다.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주변을 돌아보니, 중년이 되면서부터 너나없이, 또 어쩔 수 없이 건강에 대한 불안감들이 점증하는 듯합니다. 간단한 정기 건강검진에 임하는 마음부터 불과 한두 해 전과 달리 자못 진지해지고 긴장감마저 감돕니다. 서둘러 보험 약관을 챙겨보는 이들도 있고, 새해 금연 결심을 다잡거나 전자담배를 만지작거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평소 안 찾던 신앙을 찾는 이는 안 보이는 걸 보니, 그래도 아직은 ‘남 일’이기 때문일까요.
건강에 대한 두려움은 노화의 자각과 함께 구체화하고 또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훌쩍 늙어버린 어떤 남자가 오랜만에 청년 시절의 친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 친지들의 얼굴에 깃들인 노화의 징후들을 보면서, 화들짝 놀라 자신의 나이를 확인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늙음이나 죽음을 태연자약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남들보다 용기가 더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공상력이 적기 때문이다”(11권 ‘되찾은 시간’에서)라고 했습니다. “이제야말로 나는 늙음이 뭔지 이해하였다. 온갖 현실 중에서, 아마도 평생 동안에 가장 오래 계속해서 그 추상적인 관념을 지키는 현실인 늙음, 달력을 보거나, 편지에 날짜를 적거나, 우리의 친구나 그들의 자녀가 결혼하는 것을 보면서도, 공포나 게으름 때문에 그런 사실들이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하는구나.”
더 이상 공포나 게으름을 핑계 삼아 피하려 해도 회피할 수 없는 순간, 공상력의 결핍으로도 외면할 수 없는 순간에 인간의 노화는 현실로 확인됩니다. 우리는 늘 운명 속에서 운명의 물살 위에 얹혀 떠가지만, 일상이 아닌, 말 그대로 운명적 상황에서만 운명을 현실적 관념으로 인식하게 되지 않습니까.
순간적 퇴행을 경험했다는 저의 친지나, 종교적 초월자에게 귀의하는 신앙인들과 달리 프루스트는 소설 속에서(그리고 실제로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길로 예술을 택합니다. 노화도, 죽음도 잃어버린 시간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시간을 되찾기만 한다면, 시간을 거슬러 영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과 생명의 삶의 흔적들은 역시 시간의 여행자이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방법으로 그는 기억의 복원을 이야기합니다.
“번쩍하는 번갯불같이 인생을 살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간주케 한 순간”의 기억들, 혹은 지금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행복과 성취의 어떤 순간들, 이미 잊혀져 우리의 이성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혼의 심연 속에서 엄연히 저류(底流)하고 있을 저 시간의 감각들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각자가 누려온 세월의 길이를 거느린 인간, 자꾸만 커지고 길어지다가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마는 세월의 짐. 그 짐을 더듬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일이란, 실로 힘겨운 고독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더듬어볼 때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신엔 정신의 풍경이 있는데, 정신은 잠시밖에 그것을 관조하지 못한다. 나는 바위나 나무들의 장막으로 시야가 가려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길을 오르는 화가처럼 살아왔다. 바위 사이나 나무 사이를 통해서, 호수가 흘끗 보이곤 하다가, 호수 전경이 보인다. 화필을 잡는다. 그러나 이미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밤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 위에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는 밤이!”
프루스트는 하지만 성공한 듯합니다. 생애를 걸고 집필한, 사실상 단 하나의 이 작품으로 그는 인류가 성취한 예술적 성좌에서 가장 빛나는 별 가운데 하나로 오래도록 찬란할 테니까요.
미국 뇌과학자들이 쓴 <신의 뇌>(와이즈북)라는 책이 최근 번역돼 나왔는데 대충 훑어본바 저자들은 종교와 인간의 뇌를 달리기와 다리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우리의 뇌는 불편함을 느끼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마법사의 저주를 받은 호주 원주민이 스트레스로 앓다가 죽는 이른 바 ‘부두 데스(voodoo death)’처럼, 불편함이 지속되면 뇌의 주인이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종교는 신도들에게 종교적 규범을 부여해 삶의 질서를 부여하고 그 규범을 어길 경우 받게 되는 죄의식을 회개토록 함으로써 위안을 줍니다. 그 위안을 얻고자 자발적으로 종교시설을 찾게 된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또 종교는 인간이 지닌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 곧 불편함을 사후세계나 윤회 원리로 해소해줌으로써, 주말의 일시적인 오락이나 알코올과 달리, 근원적인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종교의식은 인간의 사회적 뇌 영역들을 활성화해 감정과 기억을 지배해 신앙을 굳히며, 육체적으로도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해하고 혈압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식물을 가꾸거나 애완동물을 보살필 때도 유사한 육체적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어쨌건, 저 모든 유한자들의 눈물겹고 고귀한 생의 분투-모태로의 본능적 회귀, 절대자를 향한 종교적 귀의, 불후를 향한 예술적 고양 등-를 넓은 품으로 보듬고 더불어 초월하고자, 업과 윤회를 벗어 열반의 경지로 인도하고자 애쓰신 단 한 분, 아니 수많은 분들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