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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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인간학(人間學)입니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불교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이상적(理想的)인 모습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육도윤회를 하는 중에 인간세상이 수행정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상락을 누리고 있는 천신(天神)의 세상이 인간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이라고는 합니다만, 그곳도 결국은 윤회(輪回)의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자기 본성을 들여다보며 수행정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이루는 공부, 신행(信行)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신(神)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은 불교공부를 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무명(無明)으로 연기(緣起)되어가는 삶의 현장에서 착각과 번뇌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업으로 인한 착각과 번뇌가 우리들의 인생살이를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가고 있는가를  근본무명(根本無明)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칼릴지브란은 말했습니다.
‘나는 나날이 거듭 태어난다. 내 나이 여든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변화의 모험을 계속할 것이다. 과거에 내가 했던 일은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일 따름이다. 나에게는 껴안을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이 삶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또 헤스켈은 말했습니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당신에 관해 가졌던 모든 근심과 걱정은 내 안에 살고 있는 치졸함과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에 의미있게 들여다 봐야할 대목입니다.


어제는 차마고도를 봤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티벳의 척박한 땅 넘어 사람들이 진하게 그리움이 되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려운데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지에서 5인 1조로 길을 떠나는 것 기억하실 겁니다. 엄동설한에 긴 여정의 길을, 세 젊은이는 1배 3보하고 두 노인은 리어카에 함께 먹을 것, 잠잘 것, 뒷바라지할 것들을 싣고 떠나는 모습은 TV 화면으로 봐도 가슴이 저릴 만큼 감격스럽고 벅찹니다.
그들에게 왜 순례의 길을 떠나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살지만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 하였습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를 것 같은 촌로(村老)의 이 한마디가 그 어떤 법문보다도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들은 길손이 되어 길을 떠나면서 말합니다.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그 죽음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죽음을 준비하고자 길을 떠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태어날 후생(後生)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힘들게 고행(苦行)의 길을 떠나고자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모든 이들의 생명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7개월 뒤 2,100km를 순례하여 티벳라싸에 도착하며 발원합니다.
‘부처님이시여, 과거에 방탕한 나로부터 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들 각자 각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매일 사는 것처럼 그냥 살고 오늘 사는 것처럼 무탈하게 살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순례의 길에서 그들은 계속하여 다짐하는 발원의 기도를 합니다.
‘저는 오직 모든 생명들의 평안을 위해서 절을 하였습니다. 리어카를 끌고가며 함께 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착한 일을 실천하며 앞으로도 살겠습니다.’
동행취재 했던 PD가 두 노인에게 묻습니다.
‘이번 순례길에서 뭘 느끼시고 뭘 깨달으셨습니까?’
‘예 자비심을 가지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엄동설한의 순례길에서 결론적으로 하신 가르침은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학(人間學)이라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분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삼천여 년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앞장서서 종교 분쟁을 일으킨 적이 없었습니다. 불자(佛子)들은 상대에게 죽임을 당할지언정 그런 전쟁이나 종교분쟁에 연루되지 않은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것은 인간학(人間學)의 가르침입니다.
두 노인은 다음 생(生)에는 마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서 모든 이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덜어주기를 바라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사람 중에는 세상을 살아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네 가정에서도 자식들을 낳은 정 때문에, 부부가 미운 정 고운 정, 그 정(情) 때문에 살아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그 어디서든지, 내가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주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달픈 인생은 살아줄 때 생기는 병(病)입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달프지 않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삶은 세상이 고달프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즐거워하는 사람도, 환희법열(歡喜法悅)한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곳이 완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즐기는 것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일어남이고, 즐거운 것은 안팎이 하나가 되는 경계입니다. 그러니 어디에 살더라도 사는 것처럼, 노력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천년을 살아도 천년의 종착역이 있고 만년을 살아도 만년의 종착역이 있습니다. 다만 대소질량(大小質量)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죽음이 단 한번으로 끝난다면 벌벌 떨 수 있습니다. 인생이 단 한번으로 끝난다면 후회막급해서 통한의 눈물을 흘려도 됩니다. 가슴을 치다 죽을 정도로 현실을 한탄할 수도 있겠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시작점입니다.
‘넘어진 자 그 땅을 딛고 일어서라’하셨듯이,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발현시키는 것이 기도이고 정진 입니다.
‘사람들은 덧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끝없는 고뇌를 받고 있다.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맑은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정구업진언~’ 하면서 가슴에서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다가 어둠[無明] 속에서 불[智慧]을 밝히면, 거기 있을게 아니면 치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망상이 아니고 괴로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 수가 없고 정리가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일념(一念)으로 ‘아미타불’을 10번만 염불해도 극락세계에 간다고들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내[我]가 죽는다고 해도 나무아미타불은 잘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간직한 평상심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평소에 저축 안 해놓고 은행에서 금전적 대출을 받으려하면 주겠습니까?
기도와 정진은 인생에 대한 저축이고 비축미입니다. 기도와 염불은 기쁜 마음으로 게으름이 없는 불퇴전의 정진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진실(眞實)함이 없으면 안 됩니다. 수행정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직한 사람의 성실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숨 쉬어지는 정념(正念)입니다.
똑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독사가 마시면 독을 내놓는다는 그 이치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정념으로 번뇌망념(煩惱妄念)을 덜어내고 무념(無念)으로 정념(正念)까지도 여의게 하는 가르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무학자(無學者)는 배운 게 없는 무식(無識)한 사람이고 불교적 무학자는 배울게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무념은 상대적으로 늘리고 감하고 하는 것을 여읜 한결같은 생각[一念]입니다. 일반적인 무념은 자기 쪼대로 사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교적 무념(無念)은 한결같이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심(無心)해야 도(道)가 나타납니다. 올바른 길이 보입니다.
불났을 때 방방 뛴다고 타던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옛날에 시골가면 집집마다 거름하려고 재래식 변소 옆에 소변통을 하나씩 놔뒀습니다. 만약 불이 났다면, 소변통에 담긴 물로 불을 끄려 하는데 다른 사람이 더러운 오줌으로는 불을 끌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깨끗한 물을 찾는 사이에 이미 집은 다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불이 났을 때 깨끗한 물로 불을 꺼본들 불에 탄 그 재들은 남을 것이고 범벅이 된 것들은 불난집을 바라다보는 현실입니다.
세상은 가슴으로만 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머리만 가지고도 살 수 없습니다. 이 둘을 아울러서 살아가는 모습이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요.
바른 지혜가 비로소 밝아지고 마음과 모든 반연이 저절로 드러나면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지혜의 빛이 허공과 같으니 지혜심지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모든 생물들을 돕기 위해서 세상에 소중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사람 사람마다 모두는 다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믿음이 승가 공동체의 화두(話頭)가 되었으면 합니다.


 E-mail : venjungwoo@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