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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마음을 가꾸는 오늘을 사는 법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우호와 양보 그리고 투명성에 준한 대화를 통해
묵은 과거의 불화를 해결할 때 상호 간의 신뢰가 구축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본주의적인 접근의 본보기입니다.
전 세계의 비무장화를 주창하는 사회운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인류가 항구적으로 진정한 평화를 구현하는
마중물이 되는데 공헌하기를 희망합니다.
                                 
                           -‘4.27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하여. 인도 뉴델리에서 달라이라마-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82, 뗀진갸초). 천여 명의 티베트 난민과 함께 인도 티베트 국경 지역 아루나찰프라데시주 따왕에 근접했던 당시 1959년 3월. 아루나찰 지역에 주거하는 티베트인은 호위 부대를 결성하고 달라이라마의 순조로운 망명길을 도왔다. 이를 기념하여 티베트 망명정부 중앙 행정부(대통령 롭상상게 박사)는 달라이라마의 인도 망명 60기를 기념하는 ‘THANK YOU INDIA (인도에 감사합니다)’ 행사를 3월 31일 달라이라마의 관저가 모셔진 겔룩빠 산하 쭉라캉에서 주관했다.
인도정부 마헤쉬 샤르마 문화부 장관이 귀빈으로 초정된 가운데 열린 이번 행사에는 아루나찰주에서 달라이라마를 호위했던 부대 가운데 현재 생존하는 일곱 명의 가족과 관련 인이 자리에 함께했다. 달라이라마는 연설을 통해 티베트와 인도의 굳건한 유대 관계를 강조했지만, 같은 주 델리에서 계획되었던 행사는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정부에 의해 취소되거나 상당부분 축소되었다. 인도 주재 언론은 인도 정부 고위층의 6월 중 앞둔 중국과의 정상 회동을 앞두고 자극하지 않으려는 행보로 해석했다.
이어서 4월 16일에는 전 세계에서 다람살라를 찾은 외국인들과 달라이라마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달라이라마는 ‘나’ 개인이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티베트가 처한 오늘의 현실과 티베트불교에 담긴 지혜의 정수를 통해 일류 보편의 가치를 찾고 실천하는데 동참하기를 권유했다. 티베트가 중국으로부터 독립이 되어 달라이라마의 거처인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으로 어서 귀환하기를 바란다는 한 외국인의 질문에 대해 달라이라마는 특유의 웃음과 함께 이와 같이 답했다.
“티베트의 포탈라궁은 고독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직무실과 화장실의 거리도 상당히 멀어서 일상 생활에 상당히 비효율적이기까지 합니다. 나는 현재 인도에 망명하여 난민의 신분으로 있지만 지금의 현실에 낙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의 지식인과 인류에 관한 공통의 문제를 토의하고 공존에 대한 대안을 함께 모색하고 동참하는데 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지난 400여 년간 존속해온 달라이라마라고 하는 거대한 이름 역시 현 21세기에 부합하는 지식인의 역할로 승화하는데 그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티베트의 법왕이야. 나는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야.’라는 수식어에 스스로를 고립시켜 외로워하기보다 티베트불교를 수학하는 사상가로서 보다 대중에게 친밀한 인물로 비춰지고자 합니다.”
마음의 무자성이야말로 마음의 명료함입니다. 이는 대상을 직시할 수 있는 바탕입니다. 이를 티베트불교에서는 마하무드라 즉 대원만이라고 해석합니다. 실상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명료한 마음을 구축해야만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행복을 구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됩니다. 더불어 공성의 진리를 통해 무명의 실상을 바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나에게 보이는 것과 같이 대상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 이를 무명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보이고 있는 바의 실상을 보는 힘이 바로 공성의 지혜입니다. 이는 상호 의존하여 발생되는 연기법의 이치로서 헤아릴 수 있습니다. 비로소 본래의 성품이라는 바가 있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실체의 본성을 봅니다. 발생에는 자성이 없습니다. 공성을 섬세히 알아갈수록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음에 대한 독을 줄여가게 됩니다. 희론을 끊는 도구는 오직 연기의 공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십시오. 실상은 오직 의지에 의한 연기에 의해 상호 의존합니다.
사물에 자성이 있다면 원인과 조건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자성이란 본래부터 그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결과가 있을 때 원인과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자성으로 인한 결과가 됩니다. 원인 역시 결과에 준하여 발생된 것입니다. 행위자와 행위 그리고 행위의 대상과의 관계를 면밀히 분석해 보십시오. 의존하여 성립하는 것 이외의 논리가 성립되지 않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실제하다고 여기는 것이 나에게 보이는 것과 같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고정된 것으로 변화할 수 없어야 합니다.
자성이란 본래의 성품으로 고정된 것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어디 한번 자성을 찾아보십시오. 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성의 실제 없음을 세속의 관점에 의하여 발견할 때 비로소 보리심의 싹이 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더불어 보리심은 이기심을 줄여감으로써 성장합니다. 공성의 논리에 준하여 상호 의존의 조화를 알아차릴 때 무자성의 실상은 마치 허깨비와 같이 비춰지기도 합니다. 오직 원인과 조건에 비롯하여 발생하기에 고정된 바가 없습니다.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바른 이를 붓다라고 정의합니다.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연기법을 찬탄하는 것은 자성의 공함을 보다 명료하게 합니다. 일체의 희론을 적멸케 하는 연기법에 대적할 논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과의 연기와 상호의존의 연기를 사유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입니다. 이로써 얻어지는 확신은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열쇠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