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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에 담긴 철학적 함의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법성게」는 그저 절에서 제사 지낼 때에 사용하는 의식문이다. 돌아가신 영가의 위패를 이동시킬 때에, 위패를 따라가면서 외는 의식문 말이다. 불교 신도들은 이런 모습을 절에서 종종 보았을 것이다.
<관음시식>을 진행할 때에, 뒷부분에 가서 <봉송奉送>을 하는 대목에도 나온다. 재자들이 위패를 가슴에 받쳐 모시고 부처님께 절을 올리게 하고, 법당 문을 나와 소대燒臺로 향하기 전에, 「법성게」를 외우면서 법당을 한 번 돌고는 소대로 가는 것 말이다. 소대가 가까우면 한두 편만 외워도 되지만, 절에 따라 소대가 멀면 수십 편을 반복해서 외우기도 한다.
어떤 절에서는 법당 안에 영단(위패단)을 모셔 놓고, 돌아가신 영가님께 「법성게」를 봉독해 드리기도 한다. 『화엄경약찬게』가 중단中壇인 신중단을 향해 독송하는 것과는 달리, 「법성게」는 하단下壇인 영단을 향해 독송한다. 왜 이렇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언제부터 불교 의례에 이런 형식이 도입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 한국 사원에서 「법성게」의 독송은 망자亡者와 연관이 깊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연구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망자를 천도하기 위해 모인 대중들을 이동시킬 때에 「법성게」를 외우면서 하는데, 그 기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존하는 의례문들은 모두 조선시대 작품들이기 때문에, 「법성게」가 재齋 의식儀式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법성게」 자체를 재齋와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 물론 「법성게」를 의식에 사용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 속으로도 깊이 전파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화엄일승법계도』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 예를 들면 고려의 균여 대사와 조선의 설잠 화상 등이 상당히 주목을 했다. 그리고 높이 평가했다. 이 분야에 대해서는 국내의 연구자들이 많은 연구결과를 내고 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필자는 「법성게」에 담겨있는 철학적 ‘의의’ 또는 ‘기능’에 대해서 간단하게 밝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법성게」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법성게」는 『화엄경』에서 설해지고 있는 수많은 교리 중에서, 유독 『화엄경』 속에만 나타나는 ‘교리[敎 śāsana]’의 논리 구조(logical organization)를 해명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그러면 유독 『화엄경』 속에만 나타나는 ‘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교圓敎’이다. 그러니 결론은 「법성게」는 『화엄경』 속에만 보여지는 특수한 교리인 ‘원교’의 구조를 이해시키고 설명하기 위한 공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법성게」의 ‘의의’ 또는 ‘기능’이다. 그러면 ‘원교’란 대체 무엇인가? 이제 이 문제를 설명해보기로 한다.
중국에서는 인도로부터 다양한 경전이 수입되어 번역되자, 그들 개별 경전 사이에 들어 있는 각종 ‘가르침[敎 śāsana]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체계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부처의 가르침(佛敎)’을 무모순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현수 법장(643~712) 스님이다.
법장 스님은 일찍이 ‘가르침’을 다섯 범주로 분석한 바 있다. 즉, (1)소승교, (2)대승시교, (3)대승종교, (4)돈교, (5)원교가 그것이다. 법장 스님의 분석에 의하며, 『화엄경』에는 (1)에서 (5)까지의 ‘가르침’이 모두 들어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원교’만은 유독 『화엄경』에만 나타나는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필자가 보기에 「법성게」는 ‘원교’의 구조를 쉽고 조리있게 해명하려고 만든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 「법성게」의 ‘의의’와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3.
그러면 ‘원교’란 무슨 뜻인가? 규봉 종밀(780~841)은 『원각경대소』 「현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교는 한 지위가 그대로 모든 지위이고, 모든 지위가 그대로 한 지위임을 밝히신다. 그래서 10신信 만심滿心이 5위位를 포섭하여 정각을 이룬다는 등등의 말씀이다. 설법하시는 분과 그 법회에 모인 대중이 완전히 갖추어졌으므로 ‘원교’라고 한다.”(신규탁 역주, 『원각경·현담』, 서울: 정우서적, 2013, 360쪽)
『화엄경』을 읽어보신 분은 다들 느꼈겠지만, 『화엄경』에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간-공간’이 뒤섞여(混融) 있다. 이 뒤섞임을 인간의 사유와 언어로 설명하기 위하여 화엄학자들은 많은 노력을 했다. 현수 법장은 『화엄경』에 담긴 이런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화엄경탐현기』의 「현담」 부분에서 <현의리분제1>(대정장35, 123a)라는 대목을 설정하여 해설을 하고 있다. ‘현의리분제顯義理分齊’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의리의 분제를 드러냄’ 정도가 될 것이다. ‘분제’라는 말은 좀 익숙히 못한 용어인데, 운허 노스님의 『불교사전』에서는 “분위分位의 차별이니 차별한 범위 또는 상당하는 위치”라고 풀이하고 있다. 필자는 이 풀이를 바탕으로 “경문에 담긴 교리 범위”라고 번역하고 있다. 역시 청량 징관(738~839) 스님도 『대방광불화엄경소연의초』(宙字卷)에서 ‘의리분제’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화엄경』에 담긴 교리의 범위를 구획 짓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서 말하면, 의상 스님의 「법성게」는 『화엄경』에 ‘담긴 교리의 범위(義理分齊)’ 중에서, 오직 ‘원교’에 해당하는 경문1에 ‘국한’해서 그 논리 구조(logical organization)를 게송 형식으로 밝히셨다. 필자는 이렇게 이해한다. 이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필자가 ‘국한’이라고 한정어를 사용한 것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이렇게 ‘국한’이라고 한정어를 사용한 필자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현수 법장이나 청량 징관의 경우는 ‘의리분제義理分齊’라는 과목科目을 설정하여 『화엄경』 전체에 담긴 교리의 범위를 구획 지었는데 반하여, 의상 조사의 경우는 「법성게」라는 게송을 지어서 『화엄경』 중에서 ‘원교’에 ‘국한’해서 그 속에 담긴 논리 구조를 밝혀냈다는 것이다. 필자의 이런 주장은 뒤집어서 말하면, 의상의 「법성게」가 『화엄경』 전체 교리의 논리 구조를 모두 밝혔다고 확장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부분만을 설명했지, 전체를 설명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부분만을 설명했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법성게」는 『화엄경』에만 유독 있는 ‘원교’의 교상敎相을 간명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냈다고는 말할 수 있다.
 
4.
‘원교’를 구조적으로 그리로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라의 의상 스님은 「법성게」를 지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면, 중국 당나라의 화엄학승들은 ‘10현문玄門’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그런데 ‘10현문玄門’은 4종의 법계 중에서 ‘사사무애’ 법계를 설명하는 방법론이다. 그리고 이 ‘사사무애’ 법계 법문은 화엄경』 중에서 ‘원교’의 교상敎相을 풀이하는 방법론이다. 법장 스님은 ‘의리분제義理分齊’ 부분에서 ‘사사무애’의 법문을 사용하여 『화엄경』 전체의 교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화엄경』에는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가 완전하게 다 구비되어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렇게 『화엄경』에는 4종의 법계가 모두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장은 ‘사사무애’ 법계 하나만으로 4종의 법계를 모두 설명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자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물론 이 ‘혼란’은 독자들 쪽의 혼란이지, 법장 쪽이 ‘혼란’을 일으켰다는 뜻은 아니다.
이 ‘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뒷날 청량 징관은 두순의 작품으로 알려진 『화엄법계관문』을 사용하여, 『화엄경』에 ‘담긴 교리의 범위(義理分齊)’를 구획한다. 청량 징관은 『화엄법계관문』을 이용하여 『화엄경』의 ‘의리분제’를 설명한다. 『청량화엄소초』에서는 네 번째의 ‘주변함용관周徧含容觀’을 설명하는 지점에 청량 스님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이 부분이 『화엄경』의 ‘원교’ 법문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의상 스님의 「법성게」는 ‘원교’의 ‘교상’에만 ‘국한’해서 해명하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법장과 같은 ‘혼란’을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화엄경』에 등장하는 ‘원교’의 논리 구조(logical organization)를 게송 형식으로 잘 밝혀내었다. 그러나 「법성게」가 왜 망자의 재 의식에 사용되는지는 역시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