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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유의 힘 ‘사마타’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깊이 이해를 하였다면 홀로 한적한 곳에 앉아라.
가르침을 마음에 바르게 두고 집중하는 사유함을 유지하라.
지속적으로 사유함에 머물며 심신의 평안을 온전히 구하라.
인내를 벗으로 삼아 관찰하고 이해하니
이를 사마타에 의한 위빠사나라 한다.
- 『해심밀경』 가운데 ‘지관’의 해석 -


‘내가 간다. 나는 가고 있다. 나는 갈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 관한 행위를 사유해 보자. 간 것. 가는 것, 갈 것의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걷고 있는 것에 가는 것이 존재한다. 어딘가로 움직이는 것에는 걷고 있음을 통해서만 가고 있음을 인지한다. 그대가 걸음에 가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가는 것이란 가는 행위와 분리 되어 가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가는 자를 통해 가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가는 것과 더불어 가는 자가 존재하니 가고자 하는 자와 가는 자는 같지 않다. 가는 행위로 인해 가는 장소를 향해 가는 것이 성립되니 오직 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이미 간 것에도 가는 행위가 없음을 사유해야 한다. 가는 바 그 행위가 보이는가. 머무름 역시 가는 것에 의해 이름 지어진 것임을 이해했는가.


실제 한다고 여기는 대상과 본래 존재 한다 여겨온 것을 재정립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를 맡고 혀로 맛을 보며 몸으로 느끼는 감각의 육근으로써 향유 대상을 인지합니다. 형과 색을 취하고 인식함에 있어 얼마만큼의 타당성을 사유하고 또한 인정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그토록 찾고 분석하고자 하는 본질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실체는 과연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합당한가를 묻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인간 내면의 변화에 관한 연구에 큰 흥미를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러시아에서 불교학자와 의식 연구센터 관계자분들이 다람살라를 찾아 티베트불교에서 논의 해온 지관의 이론과 통섭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명상은 지관 수행의 논리에 의해 해석되어 집니다. 모든 번뇌를 끊는 해탈을 목표로 삼는 것이 바로 불교 수행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보다 승화시켜 보살도의 방편으로써 공성을 통해 내면의 소지장을 완전히 끊고자 하는 목적으로 지관 수행을 합니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를 내리자면 궁극적으로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보다 바람직한 삶의 방식으로 존엄한 인간의 본 뜻을 영위하기 위함입니다. 내면의 가치를 보다 집중적으로 살피는 것에는 사실 종교가 크게 관여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70억의 인류는 인간의 존엄함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오늘날 인간 개개인이 혹은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는 사실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해야 합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우리의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사랑과 연민의 감정에 기반 한다는 이론을 증명하는데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거 인간이 직면해온 문제는 나와 상대 혹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인 상대적 관점에 의해서 발생했음을 인정하는 움직임입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은 ‘나’라고 하는 바가 우리의 일부임을 잊고 분리되어짐으로써 과거 인류사의 분쟁과 충돌의 발판이 형성됐음을 이론적으로 논증하기 위해 불교와의 대화를 여러 방면으로 주선하고 있습니다.
적이라고 하는 대상을 형성하고 그들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승리를 유도하는 논리가 과거 인간의 역사에서 보편적이었다면, 지금이야말로 관계를 재정립하고 오해와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하는 시기적절한 때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기후 변화와 같은 영역에 있어서도 인류의 보편적인 공공의 가치를 다방면으로 대입시켜야 합니다. 이는 상호 의존하는 연기의 논리로써 해결 가능한 인류의 생존과 직면한 현안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시리아와 예멘에서는 대량 학살이 자행되고 지구의 한 편에서는 여전히 굶어죽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에 대해 여러분은 얼마나 체감하시나요.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에 의해 또 하나의 인간이 살해 되는 현실을 과연 그 어떠한 논리적 근거가 있어 합당하게 설득이 되어진다고 보시는지요. 인간이 지닌 고유의 선함은 이러한 현실에 얼마나 모순적일 수 있는 것일까요.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존엄함을 어떠한 이유로 망각하게 되었을까요.
종교의 근본은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적임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종교를 뛰어넘은 가치를 위한 논리로써 현제적인 윤리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연민과 자비의 힘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삶 속에서 더불어 어울림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합니다.
내 마음이 변화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 가득한 이곳 사바세계에서 평온한 마음을 찾아 유지하고 나눔이 보편화 될 수 있도록 현실을 직시하면서 무한한 연민의 마음을 성장시키는데 깨어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현상의 진리를 직시하면 본질로써 그 무엇의 고유한 것이 없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과 같이 실제 하는 본질이 없음을 관찰하여 이해한 그 자리가 바로 공空입니다. 비로소 법의 실체, 실상의 자성을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