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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민주, 자유, 평등의 참뜻을 논함

- 삼귀·오계 및 생권生權의 내용 전석詮釋 -


성운星雲 스님
대만 불광산사 개산조


(지난호에 이어서)


현대사회에서는 민주, 자유, 평등을 제창한다. 불교의 삼보에 귀의하면 사람도 부처님처럼 불성을 지니게 되니 이것이 민주 정신이다. 오계를 수지하면 타인을 존중하고 함부로 타인을 침범하지 않으니 이것이 자유의 의미이다. 중생의 생권을 제창함은 모든 부처가 중생이 하나요, 일체 중생 또한 성불할 수 있기에 이것이 평등의 주장이다.
일찍이 2,500여 년전 부처님은 이미 현대의 민주, 자유, 평등의 정신을 전 우주에 선언하셨다. 지금 여기에 그 의미를 밝힌다.


1. 삼보귀의는 민주의 정신
‘귀의삼보歸依三寶’는 ‘귀의불歸依佛·귀의법歸依法·귀의승歸依僧’을 말한다.
불가佛家에서는 불·법·승을 일컬어 삼보라 부르는데, 이간의 경제적 민생고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세간의 금은보화에 비유하여, 정신적인 재물과 보물임을 나타낸 표현이다. 불·법·승이 있기에 생명이 승화할 수 있고 심성心性은 해탈할 수 있다.
왜 귀의삼보를 민주民主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하는가?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衆生皆有佛性 人人皆可成佛)”는 설법을 하셨다.
불성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모든 중생은 미래의 부처님이고, 모든 부처님도 처음엔 중생이었다.
자신의 본성 안에는 이미 자성삼보가 구족되어 있다. 사람은 저마다 불성이 있고, 사람은 저마다 법성이 있으며, 사람은 저마다 승성이 있다. 『반야경般若經』 권 26에서 “불보·법보·승보가 바로 평등입니다. 이 법은 모두 모인 것도 아니고 흩어진 것도 아닙니다”라고 한 것처럼 불·법·승 삼보는 한 몸이다.
삼보에 귀의함은 자신의 자성불自性佛, 자성법自性法, 자성승自性僧에 귀의하는 것과 같다. “나면서부터의 석가모니는 없고, 저절로 생겨나는 미륵도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 된 자는 누구나 이러해야 한다. ‘나는 부처다. 나는 법이다. 나는 스님이다’라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이다.


삼보에는 최초삼보最初三寶, 상주삼보常住三寶, 자성삼보自性三寶 등이 있다.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신 석가모니불을 불보라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성제 십이인연을 법보라 하며, 부처님께서 제도하신 다섯 비구와 1,250분의 대아라한을 승보라 한다. 이것이 최초의 삼보이다. 최초삼보에서 확대한 것이 상주삼보이다. 불상, 경서, 출가한 비구·비구니를 일러 현세의 상주삼보라 하다. 귀의삼보의 진정한 의미는 최초삼보와 상주삼보에서 시작해 결국 자성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귀의삼보의 진정한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사람은 누구나 불성이 있다 하였으니,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귀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진여실성眞如實性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다르지 않다(心佛衆生 無二無別).” 부처님은 중생을 자신과 평등한 지위까지 끌어올려 놓았으니, 이것이 민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교주敎主를 모든 것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정하고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성불하였다고 위대하다 하지 않으며, 중생을 자신의 발밑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부처님은 자신은 이미 깨달은 중생이고, 중생은 아직 깨닫지 못한 부처라 여긴다. 자성과 본심은 둘이 아닌 하나이니, 부처에게 귀의함은 곧 자신의 본성에 귀의하는 것이다.
귀의법歸依法에서 법은 진리이다. 진리는 우주 만물에 두루 미친다. 진리가 곧 우리의 진심이다. 진리는 온 우주에 녹아 있고 시작도 끝도 없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한 법성도 드러난 모습이 있지만, 그 드러난 모습 가운데에서도 항구하게 존재한다. 『대비로자나경大毘盧遮那經』 권2에서 “만약 모든 여래께서 출현하시든 출현하지 않으시든 모든 법은 법이法爾로서 이와 같이 머문다”라는 법문이 있다. 여기에서 “법이여시法爾如是‘는 영원불멸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중생도 부처처럼 자신의 진여자성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진여자성을 법신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의 죽지 않는 생명이다.
세간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깨달은 자의 사상’, ‘깨달은 자의 정신’, ‘깨달은 자의 명구名句’가 바로 경서經書이다. 장경藏經은 모두 불법이고, 사찰도 모두 불법이며, 선지식 역시 모두 불법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저마다 해탈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바른 길이므로 법보라고 한다.


‘승보’는 청정, 화합, 안락을 대표하는 교단이다.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하고, 중생과 성자와의 교량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한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배우며, 동일한 견해와 사상을 지니고, 함께 법칙을 준수하며, 균등하게 생활용품을 쓴다. 그들은 부처님을 대신해 중생의 고난을 해결하는 지도자이므로 승보라 한다.
이 삼보가 모여야 불교의 교단이 성립된다. 위대한 부처님께서 인간계에 남긴 이 민주적인 교단은 부처님의 민주주의 사상과 이념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 교단이 반드시 외적인 것이 결합되어 이루어졌다고 봐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에도 이 불·법·승의 진의眞儀가 갖춰져 있고, 이 교단과 부합되는 정신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재가의 사람 중에 살생을 업으로 삼는 백정까지도 칼을 내려놓으면 바로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성불할 수 있는 이 불성은 외부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새로 금방 생기는 것도 아니다.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이 마음이다(卽心卽佛 卽佛卽心).”
어떤 사람이 선사에게 물었다.


“누가 부처입니까?”
“당신이 안 믿을 것 같아 감히 말할 수가 없군요.”
“스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는데, 어찌 안 믿겠습니까?”
“그럼 사실대로 말해주겠소. 당신이 바로 부처요.”
그 사람은 ‘자신은 범주인데 어떻게 바로 부처가 될 수 있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당신에게는 ‘나(我)’가 있기 때문이오.”
“저는 ‘나’가 있어 성불할 수 없다면, 그럼 선사님은 부처가 되신 겁니까?”“‘너’와 ‘나’라는 구별이 있어 더욱 보이지 않는다.”
『유관선사어록柳寬禪師語錄』


사람은 저마다 불성이 있다. 그러나 맑은 거울에 먼지가 끼듯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빛이 보이지 않을 뿐 빛은 여전히 존재한다. 2,500여 년전 부처님은 밤에 별을 보며 정등각正等覺을 깨닫는 그 찰나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이하구나, 기이해. 내가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가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건만,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하는구나.
우리의 자성 안에는 삼보의 무량한 공덕이 이미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다.
인간은 저마다 불성이 있으니, 곧 불보이다.
인간은 저마다 차별 없이 평등한 법성이 있으니, 곧 법보이다.
인간은 저마다 청정하고 화평함을 좋아하는 심성이 있으니, 곧 승보이다.
그러므로 귀의삼보는 부처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다. 자아를 자각하고, 자아를 인정하며, 나아가 자아를 의지하고, 자아를 실현해 자신의 마음속 자성삼보를 찾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커다란 보물 광산과 같다. 귀의는 마음속 보물을 개발하는 것이고, 귀의하지 않으면 보물을 개발하지 않으니 황금을 캘 수 없다. 그러므로 『대지도론』 권2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에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지하며, 가르침을 떠난 다른 것에 의지 말라(自依止 法依止 莫異依止)”는 가르침을 남기셨다.
사람은 저마다 본래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 그래서 귀의삼보는 사실 ‘자성불에 귀의, 자성법에 귀의, 자성중생에게 귀의’하는 것이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 세 가지는 차별이 없는’ 것이며, ‘중생은 아직 깨닫지 못한 부처요, 부처는 이미 깨달은 중생’이다. 이 모두가 민주에 대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부처님은 “나는 중생 가운데 하나다”라고 말씀하셨고, 항상 보살 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너희 등은 모두 장차 부처가 될 것이기에 나는 너희들을 무시할 수 없다(『법화경』 권6)”는 말씀을 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모든 부처는 누가 더 낫고 못함이 없이 저마다 평등하며 지혜 또한 누가 더 수승함이 없이 같다. 이것이 민주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인 ‘여기성공緣起性空’, 즉 “모든 만물은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멸하다(『불설초분설경佛說初分說經』 권2)”는 것은 우주 세간의 일체가 인연법칙에 의해 운행함을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생로병사의 인연이 있고, 세계에는 성주괴공의 법칙이 있다. 인연이 모이면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 생겨났다 사라지고 또 생겼다가 사라짐(生生멸滅滅)은 자연계에 꽃이 피고 지게 만들며, 우주 간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만들며, 인간 안에 빈부귀천 등의 ‘무상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신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권력이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인과업보’는 ‘어떤 원인을 심는가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며, 귀한 자이건 천한 자이건 ‘선에는 선한 과보를, 악에는 악한 과보를 받는다’는 인과라는 굴레에서 예외는 하나도 없음을 나타낸다. 인간에게 보과 화가 끊이지 않음은 자신이 지은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며, 누군가 좌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국민을 근본으로 하는 ‘민주’의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