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 목련이시여, 흰옷 입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할 때에는 지금 하는 것처럼 법을 설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대덕(大德)이시여, 법은 반드시 여래(如來)의 가르침 그대로 설해야 합니다. 법은 중생이 아니니 중생의 티끌을 벗어난 것입니다. 자아(自我)가 아니니 욕망의 티끌을 벗어난 것입니다. 목숨 있는 것이 아니니 나는 일도 죽는 일도 벗어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니 시간적으로 앞뒤가 한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대덕(大德)이시여, 법의 특징은 고요함에 있으니 욕망의 대상이 아니며, 상대에 의존하지 않으며, 문자로 그려낼 수 없으며, 모든 언어가 끊어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온갖 생각의 물결을 여읜 것입니다. 모든 것에 두루 찾으며, 허공 같습니다. 색깔도, 특별한 성질도, 형태도 없으며, 모든 움직임을 떠나 있습니다. 내 것이라 할 것도 없고 내 것으로 취할 것도 없습니다. - 중략 -

법계(法界)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은 평등하게 존재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에 의지하지 않는 까닭에 부동(不動)이며, 머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 오지도 않고 어디로 가지도 않습니다. 법은 공성(空性)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고 무상(無相)으로 나타나며 무원(無願)의 삼해탈문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버리는 일도 없고 내세우는 일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 중략 -

대덕이시여, 이러한 법을 설할 때 과연 어떻게 해야 법답다 하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허깨비로 나타난 남자가 허깨비인 남자에게 법을 설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와 같은 점에 유의하여 법을 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대는 먼저 사람들의 근기를 잘 헤아려야만 합니다. 지혜의 눈으로 능히 꿰뚫어보고 대비심을 일으키며 대승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떠올리며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저 법의 말씀을 훤히 깨달아 삼보(佛法僧)의 맥이 끊이지 않도록하겠다는 생각으로 법을 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마경(維摩經)≫

언젠가 목련존자가 바이샬리 시내 사거리에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 유마 거사가 다가와 말한 내용입니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 모두는 각기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사리불은 지혜제일이고 목련은 신통제일이며 대가섭은 두타제일 이었습니다. 수보리, 부루나, 가전연, 아나율, 우바리, 라후라, 아난 존자 역시 부처님 제자로서 특징이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너무 긴 시간 동안 이렇게 훌륭한 가르침인 ≪유마경≫을 아주 멀리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큽니다.

≪열반경≫에 보면 수행정진을 통해서 지혜가 드러나면 번뇌망상이라는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이 사라진 자리에 교만심이 생기면 이때에는 지혜를 닦지 말고 선정을 닦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같은 제자이면서도(대승, 소승 논(論)하듯이) 출가자의 어리석은 아상(我相)이 만들어 낸 교만심이었습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실다운 부처 성품이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면서도 마치 출가자의 영역 내지는 지도를 받아야 되는 기득권처럼, ≪유마경≫의 높은 가르침을 숨겨오다가 들킨 사람 같이 당혹스럽기조차 한 이유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 만해사상 선양회로부터 연락을 받고 신문, 방송에도 발표된 만해 포교대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평화상은 현대그룹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님이 받으셨고, 실천상 백낙청 교수님, 시문학상 이형기 교수님, 학술상 정영호 교수님, 모두가 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신 원로들이십니다.

모든 이가 인정하는 분들이시니 격(格)이 높은 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자리에 부덕한 정우가 상을 받게 되었으니 정중히 사양하지 못한 소치와 우매함에 경책의 회초리가 정녕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지나온 세월의 길이만큼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이십대 초반 육군 불무리 부대에서 호국황룡사와 호국일월사를 세우고 석주 노스님, 운경 노스님 모셔다 수계식이며 부대마다 다니면서 포교 활동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삼십여년을 대중과 함께하였으니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구나 싶어지기도 합니다.

60년대 후반 파고다공원에서 동쪽문 옆에 서 있는 만해 스님의 비석을 보았고, 거기에 있는 시(詩)를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계종 교무국장 시절 뮤지컬 '님의 침묵'을 통해서 만났던 연극계와의 인연이 신시(神市)가 되었고, 연극전용극장이 있는 사찰의 주지에게 만해 포교상이 주어진 것입니다.

파고다공원의 비문(碑文)에 적혀있는 스님의 시어(詩語)가 떠오릅니다.

- 중략 -

따슨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밑 글자 읽어 무삼하리요….

- 중략 -

삼십년 넘게 가슴에 간직했던 만해 스님의 시(詩)!

그 많고많은 부처님 경전 다 놓아두고 시(詩)에 ≪유마경≫이 등장하고 또 ≪유마경≫ 읽다가 구태여 '꽃밑 글자 읽어 무엇하리요' 하신 ≪유마경≫을 밤새워 읽다가―.

아, 부끄럽고 창피한 이 모습을 더이상 숨겨서야 출가자의 살림살이가 말씀이 아니겠지요. 진정한 출가사문의 참모습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부처님 제자로써 길에서 태어나시어 길에 서 사시다가 길에서 떠나가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조리있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하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갔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부처님 품안 따뜻한 가정은 생활불교의 참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