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년전부터 꿈꾸어 오던 수미산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 오던 다음날이 구룡사에 온 지 십칠년이 되는 초하루였습니다.

법회날 정리되지 않은 수미산 길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말할 수도 없었지만 가슴 벅찬 모습만을 보였을 뿐 할 말들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꿈꾸어 왔던 수미산, 그리고 에베레스트…. 20여일 동안 3,650m에서 부터 짚차로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찾았고 십만 여명 넘는 불자들과 당간지주를 세우는(12년에 한번씩) 법회에 동참자가 되어 환희법열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으며 3일 동안 걸어서 수미산(6,000m)을 넘기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티벳 불자들, 서양사람들, 우리들도 우여곡절 끝에 단체로 통행증을 받아 음력 사월 보름법회에 맞추고자 일주일정도는 가야되는 길을 5일만에 도착한 일은 좋았으나 일행 중에는 급히 서두르며 적응 못한 후유증으로 고산병에 시달리는 스님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다녀 온 스님 중에 13Kg이나 체중이 줄어들었다) 설산에서 벌어질 수 있는 기후변화도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결국 혼자만이 꿈꾸어 오던 수미산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해 주었던 스님들이 우리네 월드컵 축구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움직여 주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큰 힘은 십만 명이 넘는 불자들의 순례 길에 수천리길을 일배삼보(一拜三步) 하면서 넘어 오고 있는 수행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결코 늦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면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내 앞에서 걷고 있는 수천 명이 있는가 하면 뒤돌아보면 수천, 수만 명의 불자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은 가슴 벅찬 법열(法悅)이었습니다.

어쩌면 동물의 세계에서, 개미가 이동하는 것처럼, 질서 있게 염불기도하며 움직이고 있는 순례자의 거대한 탑돌이 그 자체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서로 나누어주고 서로가 그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하는…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보이는 대로 담은 필름이 120통 4,000 커트가 넘는 분량을 힘든 줄 모르고 찍어 왔으니 내 자신도 놀랄 일입니다.

내년 캘린더 사진이 궁금해지고 1차 필름작업으로 우리 ≪월간 붓다≫에 화보로 빛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옵니다.

인도 성지 순레길에서 맺어지는 인연이 티벳에서는 인연 맺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미산 순례길에 만났던 많은 인연들을 생각하면 수많은 생각들이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도 더 어려운 이들을 생각하며 사양하던 스님들, 검붉은 모습이 마치 아프리카 사람들을 닮았어도 결코 낯설지 않은 사람들, 정이 넘치고 나눌 줄 아는 사람들….

수미산 가는 길에 만났던 한 노인은 손짓과 눈빛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달라이 라마 스님이나 링 린포체 스님을 만나 뵌 적은 없으나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함께 계시고, 달라이 라마 성하를 만나 뵌 스님과 만나게 되었으니 나도 만나 뵌 거나 다름없다." 하시며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을 뒤로하고 돌아올 때,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시던 노불자(老佛子)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수미산 순례길에 어쩔 수 없이 말과 야크에 실었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산을 넘으며 우리 일행을 도와주면서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던 티벳 청년과 티벳 여인은 관세음 보살이었습니다.

수미산을 생각할 때마다 잊지 못할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 순박한 미소와 친절을 보면서 참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부산 범어사의 관조 스님께서는 힘들었지만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순례길은 정우의 순례 길이었다. 수미산 순례 마치고 내려 오던 날 토담흙집 작은 방에 앉아 있는 정우가 방광(放光)을 하여 방안에 불을 밝힌 듯 하더라." 하셨습니다.

간절하면 통한다는 말씀처럼 어찌 정우라고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가슴속에 늘 꿈꾸어 왔던 수미산은 성산(聖山)이었습니다. 일생에 한번도 갈 수 없는 티벳 성산을 그것도 당간지주 세우는 해에 수미산이 열리고 하늘이 열린다는 말띠 해에 다녀 올 수 있었던 인연의 복을 남은 인생 살아가면서 올바른 곳에 회향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을 정리하고 가슴에 깊이 담겨진 이야기들을 사진을 한 장, 한 장씩 보아가면서 불자들에게 전해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나라가 월드컵 4강 진출을 한 날이기도 합니다. 구룡사와 여래사는 회관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중계되는 축구 경기를 불자들과 이웃주민들과 하나가 되어 종교도 이념도 계층의 갈등도 다 떠난 진정한 단군의 자손이요,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한마음으로 응원하였습니다.

오늘은 6백만 명이 넘은 국민들이 거리 응원에 붉은 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세계가 지켜보고 놀라워한 KOREA! COREA! 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눈시울을 적셨다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찌 그냥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IMF 때 금모으기를 했던 국민입니다. 수천 년 동안 강대국 사이에서도 한민족의 뿌리를 지켜 온 백의민족 단군 자손입니다. 우리들은 한(恨)과 넋을 달랠 줄 아는 백성입니다.

이젠 하나가 되어 어울림 속에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월드컵 우승보다 더 기쁜 것은 월드컵을 통해서 우리는 있는 그 무엇을 분명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