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 없이 살 줄 알아야

 

진묵겁전조성불(塵墨劫前早成佛)

위도중생현세간(爲度衆生現世間)

위의덕상월륜만(威儀德相月輪滿)

어삼계중작도사(於三界中作導師)

 

과거 오랜 겁 전에 이미 성불하시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셨습다.

홀로 높이 우뚝 선 덕의 모습은 둥근 보름달같고

삼계 가운데에서 중생을 이끌어 주시는 스승이십니다.

 

대중여러분께 방금 들려드린 게송은 제가 30년 전 약관을 넘긴 스물다섯 살 나이에 이곳 통도사 대웅전에서 어른 스님의 말씀을 받들어 겁 없이 법상에 올라 부처님을 찬탄한 내용입니다.

통도사 화엄산림 법회에 동참하기 위해 법당을 가득 매워준 사부대중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불현듯 그 게송을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어 읊어보았습니다.

사실 오늘 저는 법상에 오르기까지 많은 갈등을 했습니다. 이 곳 통도사 선방에 정진하러 왔으면 수행정진만 할 일이지 안거 기간 중에 선방을 벗어나 법상에 오른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해보니, 선방에 앉아서 갈등과 고민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방에 앉아서 그렇게 고민을 해보니 혼침에 빠져서 조는 시간보다도 더 시간이 안가고, 화두를 드는 시간보다는 더더욱 안가요. 그렇게 망상이라는 것이 못된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통도사는 오래 전부터 화엄산림 법회를 해 왔고 또 매년 소승도 법사로 초청이 되어온 인연으로 인해 이번에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법사 명단에 올려 진 모양입니다. 통도사 주지스님께서 뜻하신 바가 계셔서 소승을 선방에서 잠깐 불러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법문의 모든 공덕은 통도사 주지스님께 다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시겁래(無始劫來)로 우리가 살아오는 과정 속에는 석가여래 부처님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께서는 청정법신을 이루시고 원만보신을 갖추시고 천백억화신을 나투시고 계십니다. 일찍이 깨달음을 이루셨지만 중생들을 위해서 이 땅에 무수히 많은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 상호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흔히 32상 80종호라고 표현합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제석천왕도 32상 80종호를 갖추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32상 80종호를 갖추시고 항상 우리 곁에 나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법회에 나투시고 계시는 부처님의 형상은 어떠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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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든 이를 다 품어 안으실 수 있는 따뜻함을 간직한 보름달과 같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화엄산림법회가 시작된 지도 오늘로 벌써 열흘이 되었으니, 이 법석에 모이신 불자님들께서도 법회가 끝난 뒤 저녁예불에 참석해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녁예불 후 저 영축산 자락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오늘이 음력으로 11월 12일, 달도 서서히 보름달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청명하게 맑은 하늘에 보름달로 만개해가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이 법석에 나투신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 두루 계십니다. 욕계라는 세상은 욕심의 세계이고, 색계라는 세상은 물질의 세계이며, 무색계라는 세상은 비물질의 세계입니다. 오늘 법회를 막 시작하면서 여러분들도 주지스님의 집전에 맞춰 반야심경을 외우셨습니다. 방금 여러분이 외우신 그 반야심경 안에 이미 팔만장경의 가르침이 다 나와 있습니다.

가야산 해인사에 가면 고려대장경이 모셔져있습니다. 양면으로 새겨져 있는 그 경판을 모두 헤아리면 81,258장이라고 합니다. 또 쪽 수로는 16만 쪽에 이르고 그것을 경전으로 묶으면 6,791권이 된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2,600여 년 동안 계승되고 상속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경전만 해도 6,791권이라는 말입니다. 그 많은 부처님 말씀을 요약하자면 조금 전에 여러분과 함께 외웠던 반야심경에 그 내용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에 보면 「사리불이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또한 그러하니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현상이고 공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있는 현상하고 있는 그대로하고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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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식기관으로 느끼고, 이해하고, 가름되는 것을 현상(現像)이라고 하고 물질이라고 한다면,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기관을 가지고 가름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눈이 아무리 좋아도 엑스선이니, 적외선이니, 우주선이니, 감마선이니 하는 빛깔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귀가 아무리 좋아도 사이클이 맞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것과도 같다 할 것입니다. 요즘은 그것을 코드라고도 하지요? 다시 말하자면 물질과 공은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질을 떠나서 공이 있을 수도 없고, 공을 떠나서 물질이 있을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데 모으면 오대양 육대주의 큰 바다가 되는 것처럼, 모으면 일불승(一佛乘)이고 이것을 펼쳐 널어놓으면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이라는 삼승(三乘)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승을 떠나서 일불승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불승을 떠나서 삼승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설해야 할 품이 화엄경의 제19번째 품인 승야마천궁품과 20번째 품인 야마천궁게찬품, 21번째 품인 십행품인데, 지금까지 품수만 이야기했지 화엄경 내용은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만큼 불경의 내용이 방대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은 삼계의 대도사(大導師)라는 말씀입니다. 즉, 가지가지 종성을 지닌 모든 중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끌어주시고 보살펴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두에 잠깐 말씀드렸듯이 제가 절에 온지도 어언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어른스님 뜻에 따라 대웅전에서 처음으로 법문을 한지도 30년이 지났으며 서울로 상경하여 불법을 편지도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렇게 따져보니 저도 이 세상에 와서 많이 산 것 같은데, 다시 돌이켜보면 잠시잠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엊그제 절에 들어온 것 같은데 40년이 넘었고, 엊그제 법상에 처음 올랐던 것 같은데 30년이 넘었으며, 전법을 위해 서울로 올라간 지도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21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은 빠르게, 한 순간도 쉼 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시계가 있다고 시간이 가고 시계가 없다고 시간이 안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스스로 도는 것을 자전이라고 하는데,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24시간이라고 합니다. 또 지구가 태양을 쥐불놀이하듯 중력에 의해서 한 바퀴 돌아오는데 걸리는 기간을 365일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인간들은 24절기라고 하고, 한 살 이라고 하고, 1년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테두리를 만들어 놓고 그 테두리 안에 끄달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제가 서울에서 전법을 편지가 21년이 되었는데도 작년 여름과 이번 겨울 안거철에 적멸보궁이 있고 금강계단이 있는 이곳 통도사 선원에 와서 머무는 것은 그 끄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법회에서는 무슨 말을 해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통도사 화엄산림 법회는 매년 똑같이 열리는데 해마다 영가는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또 생각해보았어요. 저 많은 영가들이 현재 여기에 다 오셨을까? 그리고 위패를 떼어내면 또 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일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보리수하(菩提樹下) 금강좌(金剛座)에 앉아 계시면서도 수미산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티벳에 있는 수미산을 좋아합니다. 십여 년 전에 수미산을 참배한 이후 매년 찾아갑니다. 그렇게 매년 수미산을 찾는 데에는 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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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니까 갑니다.

여러분은 이 추운 날씨에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절에 안 오면 불안해서, 허전해서, 허탈해서, 허망해서, 뭔가 마음이 찜찜해서 오셨다면 여기에 잘못 오신 것입니다. 좋으니까 기쁜 마음으로 오셨어야 합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보리수하 금강좌를 떠나지 않고, 수미정산에 계시고 수미산을 떠나지 않고 야마천궁에 이르시니 수없는 보살과 제왕이 야단법석을 이루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금강좌를 떠나시지 않으셨는데도 야마천궁에 오시도록 하고, 도솔천궁에 오시도록 하고, 수미정산에도 계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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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걸림이 없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